천리포 수목원을 아시나요
장영희 요한 / 시인, 부산대 겸임교수 jangyhi@hanmail.net
어둠이 천천히 서해로 물러가는 새벽에 방을 나섰다. 동쪽 벌에서 막 희부연 밝음이 가늘게 숨 쉬며 다가와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는 여명이었다. 간밤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드디어 ‘천리포수목원’의 새벽 풍경을 눈에 가득 담았다. 황홀했다.
몇 해 전 어느 모임에서 천리포 수목원에서 하룻밤 묵으며 행사를 치르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참 궁금해하면서 부산에서 대여섯 시간이나 걸려 다다랐다. 비슷한 이름의 ‘만리포 해수욕장’을 가요를 통해 들은 적이 있을 뿐 ‘천리포’라는 포구가 있는지 몰랐다. 이름조차 낯선 곳에서 황홀한 풍경을 보고, 위대한 한 사람의 정말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여러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친다.
천리포 수목원은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에 있는 천리포에 자리한 수목원이다.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수목원 가운데 몇 곳은 가 본 적이 있지만, 이곳에서 받은 감동만큼 큰 감동을 받은 곳은 드물다. 이곳은 1921년 미국에서 태어나 1979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임산 민병갈(Carl Ferris Miller) 박사가 사재를 털어서 만든 국내 최초 민간 수목원이다. ‘국내 최대 식물종 보유’, ‘공익을 위한 수목원’, ‘자연과 함께 더불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앞장서는 수목원’ 등의 수식어가 말하는 것과 같이 참으로 뜻깊은 곳이다. 이곳은 설립 이후 40년 동안 연구목적 이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비개방 수목원이었으나, 2009년부터 7개 관리 지역 중 ‘밀러 가든’을 열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임산 선생은 지금 천리포 수목원 한 곳, 그가 사랑한 나무 아래 고이 잠들어 있다. 수목원의 곳곳이 감동을 주었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다 주고 간 임산 선생의 삶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다 어우러져 살아가도록 한 그의 정신과 생태적 세계관을 품고 일찍부터 실천한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과 감동을 준다. 참 부끄럽지만, 임산 선생의 삶을 통해 조금이나마 깨달은 것이 있어, 그의 숭고한 정신을 따르는 길이 없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내 깜냥으로는 조금도 실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분’께서 언젠가 내 영혼을 부르는 날이 오면 남은 몸은 꼭 필요한 분들에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게으르기도 하고 한편 두려움도 있어서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는데, 천리포 수목원을 다녀와서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 문을 두드렸다. 뜻을 전했더니 얼마 지난 뒤 ‘장기기증’, ‘각막기증’이 적힌 동그란 스티커를 보내왔다. 신분증과 자동차운전면허증에 붙이고 나니 교만과 허영으로 가득했던 내 생각이 조금 달라지고 삶의 태도에도 변화가 오는 듯하다.
삶이 힘들거나 행복하거나 간에 천리포 수목원에 한번 다녀오시길 권한다. 각자의 남은 삶의 시간이 좀 더 겸손해지고, 풍요롭고, 평화로 가득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