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에서 만난 예수님
장정애 마리아고레티 / 시조 시인, mariettij@hanmail.net
추위가 한창인 어느 날, 연극을 관람하였습니다. 아는 분이 출연한다기에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큰 극단도 서울의 대학로도 아니니, 분명 열악한 환경일 것이라 짐작되었기에 찾아 가서 저의 작은 박수 소리라도 보태고 싶었습니다. 계단을 걸어 3층에 오르자 극단 대표라는 분이 직접 검표를 하더니 잠시 복도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보통은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해 일찍 오는 대로 바로 극장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할 터인데, 그분은, 그래도 여기는 볕이라도 드니 안쪽보다는 좀 더 따뜻할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칼바람에다 주일이라 그런지, 더욱 한산한 도심의 그 소극장에서 열 명 남짓한 관객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들이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연극이 끝난 뒤 돌아오는 길에는 연극에 대한 감흥보다 문화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깨가 시렸고, 그래서 오히려 참 잘 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천 년 전에 동방에서 별자리 하나만 바라보고 베들레헴을 찾은 그 박사들은 기뻐 뛰며 돌아들 갔겠지요. 그 눈으로 인류의 구원을 확인하였으니 이제 그만 살아도 정말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믿기지 않을 만큼 초라한 구유를 보면서도 실망하지 않고, 준비해 온 보물을 바친 박사들은 분명 하느님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또 그 박사들에게서 인류의 표상을 보셨을 것입니다. 아기가 자라나서 말씀하신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라는 기도의 ‘모두’에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피부색도, 종교도 달랐을, 동방에서 온 그들도 포함이 되었을 테니까요.
해마다 교회는 성탄과 공현을 전례로 재현합니다. 이는 이 시대에도 또다시 그분께서 태어나셔야 하고, 세상 모든 이 앞에 그분께서 드러나셔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말씀하신 분께서 어쩌면 그 춥고 좁은 소극장에도 계셨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분께서는 배우들 안에 계신 예수님께 박수 소리 하나라도 보태고 싶었던 저의 마음을 황금처럼, 관객을 위하여 혼신의 연기를 한 그 배우들의 행위를 유향 대신, 그렇게 태어난 서로 간의 사랑을 몰약인 듯 받아주셨을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하니 참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행위를 할 때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또다시 태어나시고, 그 행위가 사람들 사이에 드러날 때 바로 그분의 공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런지요! 코끝이 시릴 만큼 추웠던 그 소극장에서의 돌아오는 길이 꼭 안타깝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랑이신 분께서 우리 가운데를 다녀가신 덕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