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222호 2013.06.30 
글쓴이 김기영 신부 

그 밤, 주님의 집으로 초대받은 이

김기영 안드레아 신부 / 일본 히로시마 선교 gentium92@yahoo.co.kr

두 달 전, 주일 이른 아침, 아직 쌀쌀하고 비가 오는 날이었다. 누군가 다급한 소리로 불러서 나가봤더니 70대 여성 한 분이 성당 마당 성모상 앞에 쓰러져 있었다. 구급차를 불렀지만, 끝내 그분은 돌아가셨다. 경찰에 의하면 이 여성은 그날 밤늦게 편의점에 가서 도시락을 3개나 구입했단다. 유효기간이 다 된 음식물은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볼일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춥고 비 오는 밤에 평생 와 본 적도 없는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느냐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으니 공동체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설명이 필요했다. 분명 그분의 죽음에 하느님의 섭리가 있었으리라 믿고,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교우들에게 누군지 물어보니, 근처에 사는 독거노인인데 작년 크리스마스 쿠키를 전하러 방문했을 때, 주일학교 애들 과자라도 사주라며 헌금까지 주신 분이란다. 그 말에 은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이 분은 성당 마당까지 왔다. 하지만 현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우산꽂이를 쓰러트리고, 입고 있던 옷마저 던져 놓았다. 성당 문은 24시간 열어놓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아마도 발작을 일으켰을 것이다. 괴로운 나머지 도시락 봉지와 입고 있던 겉옷마저 집어 던지고, 쓰러져서 성모상 앞까지 굴러갔을 것이다. 그렇게 밤새 추위 속에 쓰러진 채 비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때 나는 지독한 감기로 저녁 일찍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그런데 분명 그날 밤 이분에게 은총이 있었다. 만약 그날 집으로 돌아가서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 죽음을 아무도 모른 채 시신은 며칠이고 방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분은 성탄 쿠키를 들고 온 봉사자들을 예수님처럼 맞아들이고, 또 자신도 가능한 한 사랑을 베풀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이 사람의 선행을 기억해 주셨고, 마지막 발걸음을 성당으로 이끌어주셨을 것이다. 또한 사제를 통해 매 미사 때 죽은 이들을 위해 기억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하지만 이 분에게도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살아있는 우리들에 대한 메시지가 아닐까? 우리에게 성당에 가서 미사 참례하고 영성체까지 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죽을힘을 쥐어짜도 허락되지 않았다. 즉, 자신의 손과 발로 성전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총인지 깨달으라는 의미가 아닐까?

비록 이 분이 평생 하느님과 별 상관없는 삶을 살아왔을 지도 모르지만, 아기 예수님의 방문을 기쁘게 받아들였던 이 사람을 주님께서는 그렇게 기억하시고, 당신의 집으로 맞아주셨다.

호수 제목 글쓴이
2902호 2025. 12. 14  ‘자선’,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의 가르침 원성현 스테파노 
2901호 2025. 12. 7  “이주사목에 대한 교회적 관심을 새롭게” 차광준 신부 
2899호 2025. 11. 23  임마누엘, 나와 함께 하시는 이예은 그라시아 
2897호 2025. 11. 9  2025년 부산교구 평신도의 날 행사에 초대합니다. 추승학 베드로 
2896호 2025. 11. 2  나를 돌아보게 한 눈빛 김경란 안나 
2895호 2025. 10. 26  삶의 전환점에서 소중한 만남 김지수 프리실라 
2893호 2025. 10. 12  우리는 선교사입니다. 정성호 신부 
2892호 2025. 10. 6  생손앓이 박선정 헬레나 
2891호 2025. 10. 5  시련의 터널에서 희망으로! 차재연 마리아 
2890호 2025. 9. 28  사랑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김동섭 바오로 
2889호 2025. 9. 21  착한 이의 불행, 신앙의 대답 손숙경 프란치스카 로마나 
2888호 2025. 9. 14  순교자의 십자가 우세민 윤일요한 
2887호 2025. 9. 7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권오성 아우구스티노 
2886호 2025. 8. 31  희년과 축성 생활의 해 김길자 베네딕다 수녀 
2885호 2025. 8. 24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탁은수 베드로 
2884호 2025. 8. 17  ‘옛날 옛적에’ 박신자 여호수아 수녀 
2883호 2025. 8. 15  허리띠로 전하는 사랑의 증표 박시현 가브리엘라 
2882호 2025. 8. 10  넘어진 자리에서 시작된 기도 조규옥 데레사 
2881호 2025. 8. 3  십자가 조정현 글리체리아 
2880호 2025. 7. 27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걸으리라. 도명수 안젤라 
주보표지 강론 누룩 교구소식 한마음한몸 열두광주리 특집 알림 교회의언어 이달의도서 읽고보고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