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의 미덕

가톨릭부산 2015.11.05 07:25 조회 수 : 64

호수 2194호 2012.12.25 
글쓴이 정재분 아가다 

포기의 미덕 

정재분 아가다

오랜만에 등산을 했다. 산을 오르는 데 자신이 없었던 터라 경주 남산에 도착해서 신발을 점검하고 배낭도 고쳐 맸다. 산길로 접어들자 양옆에 호위하고 선 신록들에 토독토독 빗방울이 떨어졌다. 전원 교향곡이 된 빗소리에 맞추어 날씬한 풀잎은 다리를 뻗어 발레를 하고 솔방울은 뱅글뱅글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평소 운동이 부족해선지 얼마 가지 않아 숨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운동해야지’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앉을 자리만 찾던 자신이 후회되기만 했다. ‘낮은 코스라는데 용기를 내 볼까?’ 갈등한 지 오래 걸리지 않아 몸이 편한 쪽을 선택한 나는 드디어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의지가 약하고 끈기가 부족한 내 약점이 발걸음을 막은 것이다. 
내려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마음도 가볍고 얼마나 여유롭던지 인생의 안과 밖, 위와 아래가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 쉽게 바뀐다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올라갈 때는 발밑의 돌멩이밖에 보지 못했는데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가는 길엔 바람에 하늘대는 이파리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낙오자가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는데 오히려 혼자서 숲 속 잔치에 초대받은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머리부터 온몸으로 서서히 초록으로 물든 내 몸은 어느새 숲 속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번잡한 도심 속에서는 들리지 않던 청아한 새소리와 풀잎에 떨어지는 이슬의 느낌마저도 소롯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약수터에서 작은 조롱박을 걸어놓은 어떤 분의 따스한 손길을 생각하며 시원한 약수 한 잔으로 남산을 들이마셨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청량감, 축복의 땅 남산에서 받은 행복을 나누어 줄 기쁨으로 가슴이 따뜻해진 하루였다.
목표를 향해 오르다 포기하는 것은 실패와 좌절을 의미한다는 통념을 깨기에 충분한 산행이었다. 도전보다 더 아름다운 포기를 선택했기에, 오를 때는 느끼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내려오는 길에서 더 많이 깨달을 수 있었으니 큰 소득이라 하겠다.
골짜기의 물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우리는 혹여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부족한 능력에도 역류의 삶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상에 오르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려간다는 것은 나 자신도 그만큼 낮아진다는 뜻이다. 겸손해져야 어려운 이웃도 보이고 작은 것들도 소중하게 느낄 수가 있다. 화려한 네온의 불빛 속에 흥청거리는 연말, 숨어 있는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찾아보며 함께 나누는 훈훈한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왜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까? 그 의미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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