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디에?
이동화 타라쿠스 신부 / 노동사목 전담
길지 않은 인생, 오래지 않은 사목생활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진짜로’ 만나는 것은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쉽지도 않습니다. 한 사람을 진짜로 또 깊게 만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숨겨진 아픔과 상처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괴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아픔과 상처는 고스란히 나의 것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방식대로 아파한다는 걸 생각하면, 아픔과 상처를 보지 않고 진짜로 만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괴롭고 아팠던 분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의 깊은 곳에 숨겨진 아픔과 상처를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과 율법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아픈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보잘것없는 과부의 헌금 너머에서 무엇보다 큰 봉헌의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고, 그것들을 당신의 상처를 통해서, 또 당신의 상처를 치유의 원천으로 삼으심으로써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가 바로 우리 치유의 원천입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교회는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 제자 됨의 시작이고,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라고 가르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 헌장>은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아니 자신의 상처를 통해서 이웃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 예수님처럼 우리도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대림 시기 중에 인권 주일과 자선 주일을 보내면서 연민과 애정으로 이웃을 바라보기를 권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내 일과 내 삶 안에서 얼마나 사람을 진짜로 또 깊게 만나려고 했는가를. 그리고 우리 사회에도 물어봅니다. 쌍용차에서 쫓겨난 사람들, 용산에서 버려진 사람들, 강정에서 찢긴 사람들, 밀양 송전탑에서 내몰리고 울산 송전탑으로 내몰린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요. 도대체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