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 성월, 한 청년 노동자의 삶을 돌아보며……
김 태 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이주노동자사목 담당
11월, 우리 교회에서는 ‘위령 성월’로 지내고 있는 이때에 11월 13일이 기일인 ‘전태일’이라는 사람을 떠올려봅니다. 그는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스크림 장수, 비닐우산 장수, 손수레 뒤밀이꾼, 미싱 보조, 재단사 등의 일을 하며 당시 노동 현장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고 근로기준법에 맞게 노동환경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22살인 1970년 11월 13일 자신의 몸과 함께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통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의자놀이’라는 책의 초반부에서도 다루고 있듯이 당시 ‘전태일 사건’은 한국사회와 역사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 양심 있고, 생각 있는 사람들이 고민하고, 실천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한국사회의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개신교에서는 한국현실을 반영한 ‘민중 신학’이 정리되어 나왔으며, 한국 가톨릭교회의 ‘노동사목’도 체계를 잡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전태일 평전’을 읽은 당대의 수많은 대학생이 노동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습니다.
42년이 지난 오늘 한국사회의 노동 현실은 어떠하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언론을 통해서도 가끔 보여지 듯 ‘구조조정’, ‘직장폐쇄’, ‘노조깨기’등이 한창입니다.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서 수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밥줄을 잃어버리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현실입니다. 거기다 요즘 몇몇 대학생들은 ‘노조깨기’를 하는 용역 일을 하면서 동영상을 통해 해맑게 웃으며 돈 많이 벌수 있으니 여기로 아르바이트 하러 오라며 다른 학생들에게 홍보를 합니다. 자신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상관없이 돈만 많이 벌면 되는 현실입니다. 한 예능 프로그램의 표현이 우리를 세뇌시킨 걸까요? 복불복 “나만 아니면 돼!” 이 서글픈 현실 안에서 다시 한 번 전태일의 1970년 8월 9일 자 일기를 읽어 봅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여러분은 하느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200주년 신약 마태 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