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185호 2012.10.28 
글쓴이 김기영 신부 

할머니, 그래 봤자 이미 낚이신 것을

김기영 안드레아 신부

매달 한 번, 주일미사를 마치고 성당 인근 청소선교를 나간다. 강렬한 주황색의 티셔츠와 그 안에 새겨진 배 모양의 성당로고는 우리가 왜 오늘 이 자리에 모였는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손에는 빗자루, 대형비닐봉투 등 갖가지 청소도구를 들고, 얼굴에는 주님 모신 기쁨에 함박웃음 가득 짓고 성당 문을 나선다. 도로 주변 쓰레기를 줍고, 도랑 주변 잡초를 뽑으면서 피워가는 이야기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시작한 지 30분가량 지났을 무렵, 까만 모자에 보라색 선글라스를 낀 백발의 멋쟁이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서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우?” / ‘예, 저기 있는 성당에서 왔어요’ / “아니, 외국인들도 있네?” / ‘예, 나라는 달라도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께 모여서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그래요.’ / “거참 보기가 좋네.”
할머니는 이야기를 듣더니 나름의 관심을 보이면서 이것저것 물어왔다. 내친김에 어떻게든 성당에 한 번 데리고 가볼까 해서 물었다. ‘할머니, 바로 저기에 성당이 있는데, 한 번 가보시겠어요?’ / “그럽시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를 데리고 성당으로 갔다. 낯선 사람을 데려오자 교우들이 눈이 둥그레져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성전 안으로 데려갔다. 조심스럽게 성수를 찍는 방법이랑 성전 안에 설치된 제대, 감실, 십자고상, 14처 등 이것저것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우리 성당의 자랑인 ‘산상수훈’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면서 복음의 의미를 살며시 들려주었다. 그런데 다 듣고 나더니 이런다. 
“하느님이 어딨어? 그것보다 나는 나 자신을 믿지.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고, 하느님 믿고 어쩌고 하는 사람들은 다 자기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지 뭐. 나는 이 나이에도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 
세상에! 할머니는 감실을 바로 옆에 두고 하느님을 부정한 것도 모자라서 자기 자랑에 주저리주저리 입을 다물지를 몰랐다. 그래도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런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주님, 아무것도 모르는 이 할머니를 위해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오늘 이 할머니를 성전까지 이끌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미 당신께서 이곳으로 부르셨으니 앞으로도 당신께서 이끌어 주십시오.”
할머니는 난생 처음 본 성전 구경에 만족을 한 건지, 아니면 자기자랑에 만족을 한 건지 아무튼 다음에 또 오겠노라며 돌아갔다. 참으로 죄인 앞에서도 겸손하시라던 예수님 마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주님, 오늘 저 잘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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