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184호 2012.10.21 
글쓴이 정여진 

이주노동자 노동상담 봉사를 하면서...

정여진 / 이주노동자 노동상담 봉사자

어느새 가을이 왔습니다. 무심코 스치는 사람에게서 온기가 느껴집니다. 누군가와 함께 익숙한 길을 걸어가는 건 참 쉬운 일입니다. 땀 흘려 한참을 걷게 되더라도, 또 잠깐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누군가 마주하고 있다는 건 큰 힘이 되고, 마음 안의 용기를 불러일으키며 안심이 되어줍니다.
필리핀 노동자 상담봉사를 하는 동안 오히려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기쁨이 괴로움보다 훨씬 많고, 긴 노동 끝의 휴식을 기꺼이 즐길 줄 아는 사람들……. 우리의 공간에 함께 살아가며, 우리가 해결해야 할 힘든 노동을 기꺼이 도와주는 그들에게 이방인이란 깊은 아픔을 새겨 주지 않았으면 하는 안타까움도 늘 함께 했습니다.
언젠가 한 남성 필리핀 노동자는 회의실에서 상담을 기다리는 내내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안경에 가려져 눈빛을 읽을 수 없었지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조용히 앉아 있는 그분의 모습에서 어쩐지 조금의 우울함이 느껴졌습니다. 한참 다른 상담을 하는 중에도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그쪽으로 자꾸만 눈이 갔습니다. 그분의 차례가 되었고 그의 사정은, 일하던 중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된 것입니다. 
뜻밖의 사고로 한쪽 눈을 잃은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보상 범위에 대해 알려주어야 했던 그 짧은 상담 시간이 저에게는 참 아프고 무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상담을 마치고 제게 감사하단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떠나는 그분을 마음속에서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떤 보상을 떠나서 그분이 앞으로 반쪽짜리 세상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많은 이주민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해 관심을 두고 마음을 열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마음으로 안아줘야 할 일꾼들을 힘들게 하는 급여 문제, 부당한 노동 환경, 피부로 느껴지는 상처들, 마음을 다치게 하는 거친 표현들을 포함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안고 한국이란 낯선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이 그들에게도 같은 무게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그들과 우리가 만나게 된 운명적인 만남을 놓치지 않고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기꺼이 우리와 함께하려 낯선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들을 보게 된다면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르기에 혼자라면 너무 외롭고 힘들테니까요. 다가오는 계절이 좀 더 따뜻해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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