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상식
이창신 이냐시오 신부 / 직장노동사목 담당
우리나라 어느 여성 노동운동가가 독일을 방문했다. 독일은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가 우리나라보다 잘 되어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독일의 노동운동가들과 만나 두 나라의 노동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문제와 정리해고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회사와 정부가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며 그런 그들의 상식이 부럽더라는 말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2 days in Paris, 2007)’라는 영화가 있다. 여자 주인공은 프랑스 사람인데 외국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가 어머니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데모 때문에 시내 길이 막혀 혼났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불쌍한 간호사들은 데모도 못하냐? 여기는 미국과 다르다’고 한다.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프랑스 국민이 노동자들의 행동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하게 한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정당하면 파업할 수 있고, 파업으로 인한 불편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그 나라의 상식이다.
2012년 7월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 통용되는 상식을 알고 있고, 그 상식에 따라 삶의 여러 가지가 결정된다. 상식이라 해서 그 사회 구성원 100%가 모두 동의하고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상식은 분명 그 사회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상식의 색깔에 따라 사회의 모습도, 사람 사는 모습도 달라진다. 그리고 이 상식은 불변한 그 무엇이 아니다. 상식은 변한다. 그리고 상식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는 더 발전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다. 상식은 자연스럽게 발전적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상식은 무엇이 그 사회를 진정 바르게 세우는 것인지, 정의인지 고민하고, 수많은 작은 실천을 통해서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율법만 바라보고 살았다. 율법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율법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무리도 있었다. 그리고 지나친 율법주의는 많은 사람에게 구원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했다. 그게 당시 상식이었다. 예수님은 그러한 상식에 문제를 제기하신 분이다. 율법이라는 특정한 영역에 하느님이 구속되어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새로운 상식을 제시하시다가 예수님은 참 많은 고난을 받으셨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떤 상식들이 있는가? 우리의 상식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예수님식 상식이 통하는가? 그러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권력과 자본보다 사람과 생명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