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말

가톨릭부산 2015.11.04 08:38 조회 수 : 40

호수 2163호 2012.06.03 
글쓴이 탁은수 베드로 

말 없는 말

탁은수 베드로 / 부산MBC 뉴스총괄팀장 / estak@busanmbc.co.kr 

방송기자들을 흔히 ‘말로 먹고사는 사람’이라고 부를 때가 있습니다. 다양한 정보나 세상의 일들을 ‘말’을 통해 전달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말로 다 전달하지 못한 일들이 더 많습니다. 현장의 긴박감이나 처참함, 일의 전후 관계의 속사정을 제한된 시간에 말로 다 표현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유명인사의 인물됨이 알려진 것과는 다르고 공공기관의 인사나 일 처리에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작동하고 있음을 속 시원히 밝히고 싶을 때도 있지만, 반론권 보장이나 사생활 보호, 형평성, 명예 존중 등의 이유로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TV에선 바르고 정제된 표현만 써야 하니 말로 먹고살기도 힘들 때가 많습니다.
취재원들 가운데는 말이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 많은 취재원일수록 기사거리가 많지 않다는 걸 경험으로 압니다. 노련한 기자들은 가벼운 말들이나 홍보성 멘트가 아니라 은연중에 튀어나온 말이나 고심 끝에 흘려주는 무거운 말 한마디에 신경을 곧추세웁니다. 한 때는 ‘자기 PR’이라고 해서 스스로를 포장하고 알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게 심해져서 학력위조 같은 뻥튀기 PR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크고 작은 방송사가 늘어나서 사생활 엿보기 같은 방송도 여과 없이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거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뱉어내는 말들이 차고 넘쳐 세상이 시끄러운 장터가 된 듯합니다. 그야말로 말의 홍수입니다. 
하느님은 어느 곳이든 계시니까 시끄러운 장터에도 물론 계시겠죠. 하지만 장터에서 하느님을 만나 뵙기 어려운 것은 어지러운 말들에 묻혀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은 장터와 같은 곳이지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할입니다. 세상은 소리쳐야 나를 알아주지만 하느님 말씀은 목소리를 낮춰야 들을 수 있습니다. 말없이도 들을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고 정작 하느님의 응답은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세상의 말들에서 벗어나 가만히 있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길가의 나무나 풀들처럼 말입니다. 침묵의 사이로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의 말씀이 세상에 흔들리는 내 어깨에 와 닿을지 모를 일입니다. ‘말 없는 말’은 하느님을 초청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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