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의 어느 하루

가톨릭부산 2015.11.04 17:19 조회 수 : 22

호수 2156호 2012.04.15 
글쓴이 정 안칠라 수녀 

쉼터의 어느 하루

정 안칠라 수녀 / 엠마오의 집

베트남 노동자가 처음으로 쉼터에 입소한단다. 마치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방을 준비하였다. 도착했다는 소리에 나가보니, 차에서 내리는 그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함께 온 친구들이 그를 부축하여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얼른 이불을 깔아 그를 눕혔다. 얼마 전 회사에서 일하다 손을 다친 충격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제대로 치료할 수가 없었고, 치료비도 없어 병원을 퇴원했다. 그래서 붕대만 감은 상태로 내일 베트남으로 출국하여 그곳에서 치료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오기 전 정신착란 약을 먹어, 눈은 풀리고 정신은 혼미한 상태였던 것이다. 
자리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함께 온 친구들에게 밥을 먹이고, 보일러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니 모두가 따뜻한 물에 샤워부터 했다.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는 그들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미사를 다녀와 보니, 그 친구들이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혼미한 정신으로 쓰러져 자던 베트남 노동자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웃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밥을 먹어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이들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시간을 보내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 밤에 춥지 않았냐고 물으니 추워서 이불을 있는 대로 다 꺼내 덮었단다. 보일러도 올려주고, 사용하는 법을 알려 주었는데도 아까워 켜지 않았던 것이다.
조촐했지만 마음만은 풍성했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니, 휴대전화기로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마음의 걱정들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에서의 쓰라린 기억을 가진채 출국했다. 그들을 배웅해주면서 모든 일이 잘되도록 찐~한 기도를 쏘아 올렸다. 
여기 ‘엠마오의 집’은 안창 마을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쉼터이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여러 달 동안 머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지고 들어오는데, 많은 이들이 한국에서 받은 상처와 좋지 않았던 기억들로 고통받고 있었다. 쉼터를 찾는 많은 이들의 상처가 우리가 나눈 미소와 우리가 내민 손으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의 도움이 비록 작고 소박할지라도, 그들에게 작은 위로와 쉼의 공간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향기를 전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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