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읽기

가톨릭부산 2015.11.04 07:58 조회 수 : 19

호수 2134호 2011.11.20 
글쓴이 탁은수 베드로 

하느님 읽기

탁은수 베드로

딱히 갈 곳도 없었다. 하지만 가을이지 않은가. 이런 저런 일들을 제쳐두고 일주일 휴가를 냈다. 일상에 찌든 몸과 세상 욕심에 시달린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그렇게 무작정 혼자 떠난 가을 여행. 어느 작가는 “진정한 자유는 낯선 길로 들어서는 발끝에서 시작된다. 오늘 새로운 길을 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도심을 벗어나니 가을은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익고 있었다. 휴대폰을 끄고 들어선 산골 마을에서는 떨어진 나뭇잎이 흙으로 돌아가는 냄새, 말라버린 나무들이 숨죽여 내뿜는 안간힘에 진한 가을 향기가 가득했다. 스치는 가을바람은 세상의 소리를 보듬고도 청량함을 잃지 않았고 숲의 물소리는 나뭇잎의 숨결처럼 정갈했다. 가을 산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만산홍엽(滿山紅葉).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누가 그릴 수 있을까. 폭탄주에 시달리던 몸과 마음이 가을의 정취에 기분 좋게 취했다. 그러고 나니 세상살이에 핏대 높이고 어깨 부풀렸던 내가 슬그머니 부끄러워졌다. 

데카르트는 이 세상을 책으로, 세상살이는 책읽기로 비유한 적이 있다. 물론 우리에게 허락된 책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것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하느님이 쓰신 책을 열심히 읽어가는 것 아닐까. 하루하루 살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주름살이 늘고 허리가 굽고, 그렇게 조금씩 하느님의 뜻을 알아가다 마침내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는 게 남은 내 인생인 것 같기도 하다. 하느님 책에는 햇살과 바람, 나비와 나뭇잎, 몸과 마음, 시간과 공간이 모두 등장인물이고 또, 배경이다. 책을 읽는 내가 때론 주인공이고 때론 배경이 되기도 하니 인칭이 따로 없다. 때론 하느님이 내신 자연이, 때론 세상살이가 주제가 되기도 한다. 사람의 지식으로는 하느님 책을 다 읽을 수 없으나 하느님 사랑을 읽어가는 재미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했다. 활자를 통해 선험적 지식이나 세련된 감성을 얻는 것도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하느님이 내신 이 세상에 눈을 돌려보자. 도심에서도 새소리, 바람소리가 들리고 계절이 오고감을 알 수 있다. 잊고 살던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닫혔던 문을 열면 이웃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또, 하느님이 직접 내 마음에 찾아오시면 저자와의 대화도 가능하다. 더구나 이 가을, 하느님 책의 단풍 든 삽화는 세상누구도 그릴 수 없는 황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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