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 밤

가톨릭부산 2015.11.04 10:33 조회 수 : 16

호수 2110호 2011.06.19 
글쓴이 김기영 신부 

어둔 밤

김기영 안드레아 신부

작년 필리핀 다바오에 있는 ‘하우스 오브 조이’를 이야기하면서, 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카라스야마(烏山)씨를 소개한 적이 있다. 18년 전, 정부 농업 연구원이었던 그는 농촌 지도 차 필리핀에 갔다가 오히려 그곳 사람들로부터 큰 감동을 받고 다바오 인근에 고아원을 짓고 그들을 돌보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매년 5월쯤에 일본을 방문하고 전국으로 각 성당과 대학을 돌면서 표정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을 찾아 주십사고 고아들을 위한 강연과 모금을 한다. 

5월 마지막 주일, ‘하우스 오브 조이’의 그가 다시 우리 성당을 찾아주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절뚝거리면서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직 50중반이라 지팡이를 짚을 나이는 아닌데 하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 “신부님, 사실은 저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절단했습니다.” 라면서 붕대를 풀어 뭉뚝해진 발을 보여 준다. 깜짝 놀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집안 병력으로 당뇨가 있는데 이번에 심해져서 1차 수술로 엄지발가락 절반을 잘랐다가, 상태가 악화되어서 나머지 반을 마저 자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술을 한지 3개월 정도가 지났지만, 걸을 때마다 통증이 남아있고, 아직 발가락이 붙어있는 것 같아서 곧잘 헛걸음을 한단다. ‘아, 주님...!’ 우리 본당에서는 4차례 그의 강연이 있었다. 일반인들도 모처럼 성당에 와서 그의 강연을 즐겨 듣곤 했는데, 이번에는 내내 숙연한 분위기였다. 그도 이야기를 하면서 북받치는지 눈물을 많이 흘렸다. 2시간 남짓, 강연이 끝나고 절뚝거리면서 다음 행선지로 떠나는 그를 배웅하면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참조)하시며 그 고아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신 주님이신데, 어찌 당신을 그렇게 철저히 섬긴 그에게 이다지도 가혹한 일을 허락하시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문득 십자가의 요한이 남기신 ‘어둔 밤’이라는 말마디가 스쳐갔다. 

그렇다! 촛불처럼 작은 빛은 우리에게 가시적이지만 태양처럼 큰 빛은 볼 수가 없고, 억지로 보고자 하면 시력을 잃게 되어 결국 어둠만이 남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작은 빛 속에 있을 때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빛 자체이신 하느님께 성큼 다가갈 때 우리는 영적 시력마저 잃고 마치 그분께서 안 계시는 듯한 어둠을 체험하게 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나에게는 어둠뿐인 공간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께서는 현존하시고, 나는 주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게 된다. 

그의 어둔 밤을 통해서, 주님의 현존을 뜨겁게 체험한 은총의 5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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