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택나는 묵주알

가톨릭부산 2015.11.04 10:30 조회 수 : 35

호수 2106호 2011.05.22 
글쓴이 김기영 신부 

광택나는 묵주알

김기영 안드레아 신부 

외출을 다녀오니, 성당에 한 형제가 작업복 차림으로 나지막이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웬 낮 시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뒷모습을 보니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작년부터 연로하신 홀어머니와 지체 장애가 있는 남동생을 데리고 성당에 나오던 분이었다. 키도 크고 손재주도 좋아서 천장 청소와 구유 수리까지 워낙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던 분이라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년 전부터 소식이 뚝 끊기고 말았다. 궁금해 하던 찰나에 제 발로 찾아 와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게다가 조배를 드리고 있으니 ‘아, 드디어 냉담을 풀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인사를 건냈다. 인사를 하면서 쓱 훑어보니 모르긴 해도 고생을 무진장 한 얼굴이다. 시원한 사이다 한 잔을 권하면서 왜 이렇게 연락이 뜸했냐면서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순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완전히 흙빛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형제는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업을 하던 친구가 가게를 새로 알아본다면서 돈을 빌려갔는데, 그만 모조리 싸들고 야반 도주를 해버린 것이다. 피해액이 얼마냐고 물었다가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800만엔! 아니 어쩌자고 그 많은 돈을 다 빌려줬냐며 오히려 흥분을 했다. 그 돈이 어떤 돈인가! 스무 살 때부터 쉰 살이 다 되가도록 손에 굳은 살 박히고 기름때 묻혀가면서, 장애가 있는 남동생을 돌본다고 결혼도 안하면서 알뜰살뜰 모은 재산이 아닌가! 그 돈을 몽땅 다 잃어버리고, 지금은 입에 풀칠만 하고 살고 있단다. 그렇게 일을 수습하는데 꼬박 반년이 걸렸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도망간 친구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위로를 해야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이 말을 듣고서는 머리 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다면서 깊은 용서를 청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당에서 도와줄 일이 없겠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괜찮다며 오히려 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모금에 함께하지 못하는 게 마음 아프단다. 

그 친구 밉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뜸 묵주를 내밀면서 이런다. “신부님, 저 이거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나서 가족 셋이서 매일 묵주기도 바치면서 지금까지 견뎌왔어요. 여기 묵주알 광택나는 것 좀 보세요.” 하면서 씩 웃는다. 

성모 성월을 지내면서, 하늘의 어머니께서 우리 인생길의 참으로 좋은 위로자가 되어주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형제의 가족들을 붙들어 주심에 더없는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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