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현장
탁은수 베드로 / 수필가
“현장부터 가봐” 한창 교육 중인 수습 기자들에게 난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자란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면서 감을 키우는 거야” 초년병 기자 시절 나도 이렇게 배웠다. 때론 현장 출입이 쉽지 않을 때도 많다. 그래도 정확한 기사를 쓰려면 남의 말을 순순히 믿기보다는 직접 가서 보고 들어야한다. 그것도 마감 시간에 쫓겨 가며 일해야 하니 기자로 먹고 살기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기자들이 의심 많고 성격 까칠하다는 소리도 듣는다. 예수님 제자 중에 기자가 있었다면 토마스처럼 못 자국을 직접 확인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을까?
며칠 전 우리 집 앞마당의 묘목을 보고 사람의 인식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깨달았다. 지난해 식목일 때쯤 묘목 두 그루를 앞마당에 심었는데 일 년이 지나도록 싹을 틔우지 않았다. 모두들 잘 못 심었거나 겨울에 얼어 죽은 것이라 했다. 내 눈에도 분명 죽은 나무였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나무에서 파란 싹이 돋았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생명은 힘든 시간을 견뎌내며 스스로를 지켜온 것이었다. 아차 싶었다. “내가 보고 들은 게 전부가 아니구나. 생명은, 우주의 질서는 사람의 인식과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구나”
사랑 해 본 사람은 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 할 때 그 분명한 설렘과 가슴 떨림을.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 있다는 걸 믿는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곁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물며 이천년 전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을 지금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 집 앞마당의 나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아채지 못한 내 식견으로 부활을 따지고 확인하려 든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들길을 걸으며 여기 땅값이 얼마일까를 생각하고, 예술과 사랑에도 돈의 잣대를 들이대는 세상의 어리석음으로는 부활의 신비,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다.
하지만 마음을 열면 부활의 현장은 곳곳에 넘친다. 봄 기운에 고개를 내민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계절마다 모습을 바꾸는 별자리, 과학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우리 몸의 신비까지 하느님의 창조 질서는 온 세상에 가득하다.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에서,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에서, 때론 이웃의 모습이나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싱싱하게 물이 오른 신록의 나뭇잎은 어서 빨리 부활의 기쁨을 전하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이런 부활의 현장은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아이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