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이 함께 걸어주심에
지난 달, 일본 남쪽, 시마바라(島原) 반도의 하라(原)성 순례를 다녀왔다. 올 한해, 성당 30주년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교우들이 영육 간에 재충전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한 순례였다.
시마바라의 난(1637-1638)! 막부의 키리스탄 금교령에 의해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해 있을 때, 특히 시마바라 아마쿠사(天草)지방의 박해는 이루 말로써, 글로써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불어 시마바라 성의 축성에 따른 가혹한 노역과 무거운 세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 년간의 흉작은 그야말로 농민들의 궁핍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갔다.
이에 1637년 12월, 16살 소년 '아마쿠사 시로(天草 四?)'를 필두로 농민들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하야자키(早崎)해협을 건너 아마쿠사 측에서 1만 4천여 명, 시마바라 측에서 2만 3천여 명, 총 3만 7천여 명의 농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단결의 구심점으로 이미 황폐해진 하라의 고성에 들어가서 농성을 시작했다. 막부군은 12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3개월 간 봉기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1638년 2월 28일의 총 공격으로 막부군은 1만 수천 명이 죽고, 봉기군은 식량도 없이 해초와 나무껍질로 연명을 하다가 연락책이였던 '야마다 에코사쿠(山田 右衛門作)' 1명만을 제외하고, 남녀노소 3만 7천여 명 모두가 참수로 전멸한 사건이 바로 시마바라의 난이다.
하라 성의 순교사를 들으면서 특히 가슴 뭉클했던 점이 있다. 금교령으로 선교사들이 모두 처형되거나 추방된 상황에서 그들은 더 이상 미사 참례도, 영성체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체 대신 동그란 성모의 기적패를 입에 넣고, 막부군의 시퍼런 칼날 앞에 신앙의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 것이다. 지금도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지만, 머리와 몸통이 떨어져나간 유골에서 곧잘 기적패가 함께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순례 마지막 날 아침, 전날 밤 손전등 하나와 묵주기도에 의지하며 빗속을 걸었던 야간 도보 순례를 뒤로하고, 하라 성 꼭대기 본진의 십자가 밑에서 여행 가방을 제단으로 삼고 야외 미사를 참례했다. 미사 중에 참으로 죽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천상의 식탁에 함께 하고자 했던 순교자들의 뜨거운 열망이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과 떨리는 손으로 성체를 거양하면서 순교자들과 함께 성체를 영했다.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간 선교 중에 이것만은 내려놓고 싶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짐들, 차마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서 나는 말할 수 없었다.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일본 교회지만, 그분들이 함께 걸어주심에 오늘도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