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
나의 기억 저편에 아련하게 남아 있는 아버지 모습이 매년 11월이 되면 선명해진다.
오래 동안 병석에 계시다가 11월 6일에 하늘나라로 멀리 가신 아버지, 영원히 만날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는 엄청난 상실감에 불우하고 슬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 또다시 11월에 오빠가 그토록 사랑하던 가족들을 뒤로 하고 떠났다. 그날은 11월 1일이었는데, 나이 드신 분들이 ‘모든 성인의 날’이라 오빠는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당으로 바로 들어갔을 거라며 슬픔에 잠겨있는 우리가족들을 위로해 주었다. 그것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 배우자를 떠나보내는 그 슬픔에서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하신 말씀들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날지 모른다. 무엇을 위해 산다는 것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더 고민하라는 말처럼, 죽음 또한 준비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11월은 한국노동운동의 한 획을 긋은 전태일 열사의 추모 기간이기도 하다. 그는 40년 전, 1971년 11월 13일 청계천 섬유공장 다락방의 어린 여공들의 처참한 노동 환경을 안타까워하며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희망이 되고 싶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철저히 나누며 살았던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동료 여공들이 열악한 근로 조건에서 질병과 가난으로 쓰러져 가는 것을 지켜보기 힘들었던 ‘고 전태일’은 몹시도 괴로워하면서 끝내 자신의 한 몸을 불살랐다. 이 땅의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사회 환경이 변화되기를 바라면서 “근로기준 법을 지켜라”외치며 산화해 갔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야말로 온 몸을 던져 자신보다 더 약하고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이들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사회는 충격을 받았고 양심 있는 지성인들이 깨어났다.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나만 잘 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는 보장 받아야 한다는 것을,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그들에게만 맡겨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 청년의 숙연한 죽음으로 깨어있는 양심들의 사회 참여 연대 의식이 살아났다. 물론 40년이 지난 지금도 노동 문제는 새로운 것으로 생성되고 당사자들은 또 다른 사회적 약자로 남아있다. 하지만 참다운 의인들의 삶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간, 이들을 위해 기도드리자.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자연스럽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게 되고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게 됨으로써 더욱 성실한 신앙 생활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