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참극 한 토막

가톨릭부산 2015.11.02 16:05 조회 수 : 26

호수 2056호 2010.07.04 
글쓴이 강문석 제노 

전쟁의 참극 한 토막

강 문 석 제노 / 수필가 hepi2u@hanmail.net

여름 햇살 따갑게 내리쬐던 강변 백사장. 피난민은 3백여 명이나 되었지만 크게 동요하거나 전전긍긍 불안감을 드러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같은 도시에서 살던 이웃들인데다 친인척간이 많아서 서로 위안이 되기도 했겠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집을 떠나 낙동강을 따라 백 여리를 남하하는 동안 가끔씩 북쪽에서 들려오는 포성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백사장에다 솥을 걸고 수제비를 끓이거나 국수를 삶으면서 강을 건널 준비를 마쳤고 군 진지에서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강 상류 상공에 4대씩 횡대를 이룬 전투기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접근했다. 피난민들은 영문도 모르면서 약속이나 한 듯 태극기를 꺼내들거나 윗도리를 벗어들거나 보자기를 풀어서 저공 비행으로 조종사 얼굴까지 또렷해진 비행기를 향해 일제히 흔들어댔다. 전세는 파죽지세로 밀려 조국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놓였는데 전장에 투입되어야 할 전투기가 후방의 피난민들을 위로해주기라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전투기들은 저만치 강의 하류를 비스듬히 돌더니 환호하는 피난민들을 향해 더욱 낮게 다가오면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백사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어 붉은 피로 물들었다. 7살 꼬마였던 나도 본능적으로 머리 위에 퍼붓는 총탄을 피해 내달렸지만 마음만 급했지 모래사장은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비 오듯 퍼붓는 총탄에 솟구치는 모래줄기는 나의 키를 훨씬 넘었다. 순식간에 시신이 즐비한 모래사장엔 팔다리가 잘려 피를 쏟으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부상자들로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졌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피난민들은 둑에 늘어선 버드나무에 가마니나 자리를 둘러 몸을 숨기기도 하고 더러는 피난 떠난 강가 부락의 빈집으로 숨어들기도 했다. 

내 아버지도 그날 30대 중반에 그렇게 생을 마감해야만 했고 어느새 60년 세월이 흘렀다. 일제 강제 징용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귀국한 지 5년 만에 맞닥뜨린 동족상잔에서 너무도 억울하게 희생되신 아버지를 위해 늦은 진혼제라도 올려야 할 것 같다.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추풍령 밑 작은 도시에서 살던 순박한 사람들끼리 떠난 피난길이었는데 어떤 음모가 있었기에 우리 일행 중에 빨갱이가 섞였다면서 선량한 백성들을 떼죽음시켰단 말인가. 60년을 살면서 줄곧 이렇게 원통한 일이 세상에 또 있으랴 싶었다.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6. 25사변이 차츰 잊히고 있어서 안타깝다. 월드컵 응원 열기만큼만 우리 국민들이 천안함 사태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나라의 안보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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