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끊었습니다

가톨릭부산 2015.11.02 15:45 조회 수 : 26

호수 2041호 2010.03.21 
글쓴이 탁은수 베드로 

술 끊었습니다

탁은수 베드로(부산MBC 기자) estak@busanmbc.co,kr 

20일전쯤, 시청 앞 공원에 첫 꽃이 피었다. ‘이제 봄이다’ 싶었는데 기온이 다시 내려가고 부산에는 흔치 않은 눈까지 내렸다. 사람들은 두터운 외투를 다시 꺼내 입었지만 한 번 고개를 내민 꽃들은 온 몸으로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찬바람에 흔들리는 꽃봉오리가 안쓰러워 자꾸 눈이 갔다. 꽃 한 송이 피는데도 이토록 시린 시간을 견뎌야 하는 걸까. 추위 속에 찬 비 맞으며 봄을 기다리는 꽃송이를 보며 결연한 마음까지 들었다. ‘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모진 겨울을 견뎌낸 꽃들이 찬바람에도 포기하지 않는 결심으로 눈꽃을 터뜨려야 비로소 봄이 온다.’ 

사순 기간 난 술 끊을 결심을 했다. 가족은 놀랐고 주변사람은 믿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술자리를 전전하며 술꾼 소리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이번 사순만큼은 취하지 않고 깨어 있고 싶었다. 맑은 정신으로 수난과 고통의 신비를 따라가며 주님께 엎드리고 싶었다. 억지로 술 유혹을 밀쳐내고 나니 평일미사나 사순특강, 십자가의 길 등 성당 가는 시간이 늘었다. 몸도 건강해졌다. 그러나 술 끊기가 쉽지만은 않다. 친구들 전화는 어렵게 따돌려야 하고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선 아프다고 둘러댔다. 운동이나 목욕 끝나면 맥주 한잔이 간절히 생각나기도 했다. “술이 무슨 죄라고. 그동안 안 마셨으니 이제 한잔 쯤 마셔도 봐 주시지 않을 까“ 아직 사순시기인데 술 끊겠다는 내 결심은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사순절을 지내며 고등학교 때 배운 시 구절이 생각났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주님의 품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영광스런 부활로 다시 오신다. 꼭 오신다는 믿음, 다시 만나겠다는 결심만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꽃들이 봄을 맞이하듯, 고난을 피하지 않아야 온전한 부활의 기쁨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작심삼일이 인지상정. 강한 의지와 두터운 신심을 가진 분들도 많지만 결심이 흔들리고 약해지는 게 보통의 일상이다. 어쩌면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게 회개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의탁하고 도움을 청하게 된다. 이제 곧 부활이다. 사순기간 결심했던 참회와 보속의 각오가 약해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난 술 유혹을 계속 참을 생각이다. 꽃피는 봄, 부활 축하 인사를 기쁘게 나누고 난 뒤에 시원한 맥주 한잔 들이킬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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