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038호 2010.02.28 
글쓴이 김종일 요한 

내 삶의 스승인 뇌성마비 소년

김종일(노동사목 사무국장)

저마다 삶의 길잡이로 삼는 스승이 한두 명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몇 사람의 스승을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그런데 얄궂게도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스승은 학교 선생님이나 유명인이 아닌 나보다 나이 어린 뇌성마비 소년이었다. 어느 해 겨울 방학, 나는 경기도에 있는 장애인 학교로 봉사활동을 갔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학교라 그런지 시설도 깨끗했고 아이들의 표정도 밝았다. 수련을 갓 마친 햇병아리 수사였던 나는 수녀님들보다 자유분방하고 나이도 어려선지 아이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는데, 문학 동아리 소속 뇌성마비 아이들이 유난히 나를 따랐다. 

어느 날 저녁, 문학 동아리의 한 아이가 나를 찾아와 이야기를 청했다. 내일이 몸이 아픈 엄마 환갑인데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찾아뵙고 싶다는 거였다. 전라도 광주까지 먼 길이라 누군가 함께 갈 사람이 있냐는 말에, 아이는 혼자 힘으로 광주까지 가야 의미가 있다며 수녀님께 허락을 받아달라고 졸랐다.
“나 때문에 평생을 눈물로 살아온 엄마한테, 엄마의 보살핌 없이도 혼자서 꿋꿋하게 잘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을 해드려야 맘 편하게 돌아가실 거예요. 사실 난 천덕꾸러기 미운오리새끼가 아니라 하늘을 날 수 있는 백조예요. 그런데 엄마는 그걸 모르고 걱정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남들처럼 혼자 힘으로 그 먼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은 거예요.” 
눈물로 호소하는 그 아이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난 내리는 눈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수녀님과 선생님들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아이를 찾아 헤맸다. 아이의 행방을 짐작할 수 있었던 나 또한 불안했지만, 서울로 가야 할 처지여서 아이 집으로 전화해 볼 것을 부탁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발목 이상 내린 눈을 헤치며 지하철역으로 가는 내내 난 아이의 안전을 바라면서도 그 무모함을 꾸짖었다. 얼마쯤 갔을까, 뒤에서 “아이에게 전화가 왔는데, 전화 받아보세요”하는 선생님의 고함소리에 미친 듯이 학교까지 뛰어와 전화를 받았다. 아이의 목소리는 자부심과 환희로 들떠 있었다. “수사님, 나 날개 달았어요, 날았다고요” 전화를 받는 내 가슴은 벅찬 울음으로 터질 것 같았다. 

20대의 나는 오만함과 방자함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어쭙잖은 지식과 신념을 쉼 없이 떠벌리면서도 정작 ‘실천’에 게을렀음을, 행동하지 않는 지식이나 신념은 ‘진실’일 수 없다는 것을 그 아이를 통해 비로소 깨우치게 된 것이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스승의 예를 갖춰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다.

호수 제목 글쓴이
2888호 2025. 9. 14  순교자의 십자가 우세민 윤일요한 
2887호 2025. 9. 7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권오성 아우구스티노 
2886호 2025. 8. 31  희년과 축성 생활의 해 김길자 베네딕다 수녀 
2885호 2025. 8. 24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탁은수 베드로 
2884호 2025. 8. 17  ‘옛날 옛적에’ 박신자 여호수아 수녀 
2883호 2025. 8. 15  허리띠로 전하는 사랑의 증표 박시현 가브리엘라 
2882호 2025. 8. 10  넘어진 자리에서 시작된 기도 조규옥 데레사 
2881호 2025. 8. 3  십자가 조정현 글리체리아 
2880호 2025. 7. 27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걸으리라. 도명수 안젤라 
2879호 2025. 7. 20  “농민은 지구를 지키는 파수꾼이자 하느님의 정원사입니다.” 서현진 신부 
2878호 2025. 7. 13  노년기의 은총 윤경일 아오스딩 
2877호 2025. 7. 6  그대들은 내 미래요, 내 희망입니다. 이나영 베네딕다 
2876호 2025. 6. 29  주님 사랑 글 잔치 김임순 안젤라 
2875호 2025. 6. 22  “당신은 내 빵의 밀알입니다.” 강은희 헬레나 
2874호 2025. 6. 15  할머니를 기다리던 어린아이처럼 박선정 헬레나 
2873호 2025. 6. 8  직반인의 삶 류영수 요셉 
2872호 2025. 6. 1.  P하지 말고, 죄다 R리자 원성현 스테파노 
2871호 2025. 5. 25.  함께하는 기쁨 이원용 신부 
2870호 2025. 5. 18.  사람이 왔다. 김도아 프란치스카 
2869호 2025. 5. 11.  성소의 완성 손한경 소벽 수녀 
주보표지 강론 누룩 교구소식 한마음한몸 열두광주리 특집 알림 교회의언어 이달의도서 읽고보고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