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

가톨릭부산 2015.11.02 15:40 조회 수 : 121

호수 2035호 2010.02.07 
글쓴이 김기영 신부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

김기영 신부

성 비안네 신부님의 선종 150주년을 맞아 작년 예수성심 대축일부터 우리는 <사제의 해>를 지내고 있다. 매년 히로시마 교구에서는 3박 4일간 히루젠(蒜山)이란 곳에서 사제 연수회를 갖는데, 여기에는 교구 사제들 뿐 아니라 교구 내에서 활동하는 각 수도회 사제들까지 모두 모이기 때문에 <사제의 해>란 말이 더욱 실감났다. 특히, 이번 연수는 따로 외부 강사를 초빙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자신이 서품 때 고른 상본과 성경말씀을 동료사제들과 함께 나누는 색다른 느낌의 연수였다. 날이 빳빳한 새사제의 상본부터 어느덧 세월과 함께 빛바랜 노사제의 상본까지, 하느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네, 여기 있습니다!’ 라며 주님을 따라 나섰던 순명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50명이 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임을 느끼는 소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중 한 신부님의 사연이 가슴에 남는다. 그 신부님은 상본이 없었다. 16년 전 서품식 날, 이제 막 새사제로서의 힘찬 포부를 안고 성당 문을 나서던 순간, 신부님의 얼굴은 일그러질 수 밖에 없었다. 성당 마당 한 귀퉁이에 오늘 나누어 주었던 서품상본 수십 장이 땅에 떨어진 채 구둣발 자국으로 짓밟혀져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그리고, 새사제의 앞길을 축복해주지는 못할망정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돌아가는 길로 그 신부님은 그 날의 기억을 씻어버리기 위해 남은 상본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연수에도 참석할까 말까 사실은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그렇게 그날의 상처는 아직도 신부님의 얼굴 한켠에 어두운 그늘로 남아있는 듯 했다. 그때였다! 70이 지난 한 신부님이 문득 오래된 상본 한 장을 그 신부님에게 내밀었다. “이 상본이지? 이제 가져가~” 모두가 깜짝 놀랐다. 노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날 버려진 상본을 주워서 16년 동안 쭉 기도서 안에 끼워놓고 매일같이 이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누가 과연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을까! 

그 날 이후,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계속 내 가슴을 울렸다. 이로써 그 신부님은 그 날의 상처를 전부 감싸고도 남을만큼 크고 깊은 사제의 마음을, 아니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더불어 풀리지 않는 내 인생의 물음에 하느님은 이렇게 답해 주시지 않나 싶다. 또한, 신자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기도해주는 사제들의 모습 안에서 <사제의 해>안에 숨겨진 참된 보물을 발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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