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주름살

가톨릭부산 2015.11.02 15:35 조회 수 : 33

호수 2028호 2009.12.27 
글쓴이 탁은수 베드로 

아내의 주름살이 유난히 눈에 띠던 날 한마디 했다. “늙어 보인다.” 이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느니, 화장품 하나라도 제대로 산 준 적이 없느니 하는 잔소리가 돌아왔다. 아내의 주름살이 안쓰러워 한 말인데 표현은 이렇게 겉돈다. “속 썩이는 나랑 사느라 고생이 많아” 하는 말은 쑥스럽다. 어느 시인은 ‘주름살은 살아가는 온갖 것의 경험을 늘리는 것’이라고 했다. 난 나이 먹어가는 아내의 주름살과 통통하게 부푼 똥배가 싫지 않다. 

소설가 박범신은 부부는 3단계의 인생을 함께 겪는다고 했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이 황홀하게 보이는 낭만주의 단계다. 두 번째는 거친 세상과 부딪히며 가족을 지켜야하는 현실주의 단계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휴머니즘의 단계다. 휴머니즘의 단계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인생의 승부를 가른다고 했다. 눈에 콩깍지를 못 벗은 젊은 부부들은 모를 수도 있다. 아침 눈뜨자마자 맡게 되는 배우자의 텁텁한 입 냄새와 잠자리를 가리지 않는 방귀냄새가 밥 짓는 냄새처럼 익숙해져야 비로소 휴머니즘이 시작됨을. 배 둘레의 살과 기미, 주름살 등등이 휴머니즘의 상징임을. 

아이들에 이르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얼마 전만해도 “아빠는 모르는 게 없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요즘은 “아빤, 그것도 몰라?”로 바뀌었다. 연예인 이름 좀 모른다고 대화에서 소외되기 일쑤고 영어 발음이 나쁘다고 면박도 준다. 늦게 들어가 장난이라도 걸라치면 술 냄새 나서 싫단다. 사춘기가 막 시작된 큰 딸은 부쩍 짜증이 늘었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딸들 애교 한 번에 섭섭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그래, 그래서 가족이다. 늙어가는 아내의 잔소리가 귀에 따가워도, 딸들의 말에 마음이 상해도 퇴근 종만 울리면 눈에 선한 곳. 서로의 마음을 보듬으면 어떤 상처도 낫게 하는 곳. 전쟁터 같은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는 곳. 내겐 그곳이 성가정이다. 

내년에는 아내에게 잘 할 생각이다. 술도 줄이고 용돈도 아껴 쓰고 평일미사도 같이 가고 잔소리도 좀 들어줄 생각이다. 딸들에게도 마찬가지. 서점도 가고 미술관도 다니면서 같이 놀고 글쓰기도 도와줄 생각이다. 그런데 잠깐. (“그러면 내 친구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술집으로 날 불러내는 그 좋은 친구들은 언제 만나지? 상사 안주 삼아 스트레스 풀던 후배들은 어떡하고. 재미 들린 주말 운동도 포기하자니 아쉽고 가끔은 나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한데---”) 좋은 남편, 좋은 아빠 되기가 쉽지 만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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