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울게 하소서!

가톨릭부산 2015.11.02 15:33 조회 수 : 41

호수 2026호 2009.12.20 
글쓴이 김기영 신부 

작년 초,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성 2명이 교리반에 등록을 했다. "왜 우리 성당에 오셨습니까"라고 물으니 한 분은 '앞에 다니던 예배당이 망하는 바람에'였고, 또 한 분은 '술 좀 그만 마시고 싶어서'였다. 두꺼운 돋보기 안경 너머로 깨알같은 성서 구절을 읽어가면서, 어줍잖은 외국인 신부의 강의 내용을 적어가면서 1년 간 참 성실히도 공부했다. 곧 있을 부활 때 세례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매일이 즐거웠다. 

막상 세례식을 2주 앞두고 일이 터졌다. '술 좀 그만 마시고 싶다'던 그 분에게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이 분의 부인은 신도(神道)신자였는데, “죽는 한이 있어도 남편의 영세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년 간 운전 못하는 남편을 위해 매주같이 성당에 바래다주던 그 정성은 어디 가고, 왜 갑자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인즉, 무엇을 하건 작심삼일이던 남편이 문득 성당에 간다길래 '그래, 한 번 가봐라. 이번엔 얼마나 가는지 보자'는 식이었단다. 그런데 설마하니 영세까지 받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오히려 잘 된 것이 아니냐고 하니까 '지금 다니고 있는 신사(神社)사람들에게 몇 십 년째 신세를 지고 있는데 이제 와서 남편이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이상 남편이 성당을 나가거나 영세를 한다면 이혼까지 불사하겠다고 협박(?)을 해 오니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6년 간 선교 중에 이처럼 의욕을 상실한 적이 없었다. 청년성서모임을 열고 달랑 1명이 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후 ‘차라리 이 정성으로 한국에 돌아간다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그렇게 내 마음은 선교지를 떠나 있었고, 텅 빈 가슴으로 1달째 성무를 집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본당신자들과의 자리에서 한 분이 그 예비자의 근황을 물어왔다. 순간 가슴이 너무나 아파왔고, 이곳 신자들에게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 일로 인해 그간 마음을 다하지 못한 성무 집행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한 신자 분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신부님, 비록 신자 수는 한국교회에 비해 적을지 모르지만, 신부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결코 그분들에 비해 작지 않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수단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면서 상처 난 마음에 새살이 돋아남을 느꼈다. 그렇게 주님은 이들의 입을 통해 부서진 한 사제의 마음을 치유하고 계셨다. 왜 이곳으로 나를 부르셨는지 분명히 가르쳐주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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