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기다림
아기 예수님 탄생이 며칠 남지 않았다. 희망을 주고 어둠을 이길 빛을 주시리라 기대하며 기다리는 마음이 어느 해 보다도 간절해진다. 해마다 12월이면 어렵고 힘든 이웃을 돕기위해 곳곳에서 불우 이웃 돕기 행사가 많다. 빨간색의 구세군 냄비도 등장한다. 누가 얼마를 성금 하였는지 각 언론사를 통해 방송되기도 한다.
갈수록 어렵다는 살림살이 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한푼 두푼 내어 놓는다. 해마다 수십억 원이 모금 되고 그 돈이 불우이웃에게 전달된다. 소녀소년 가장들의 학비와 생계비에 도움을 주고, 지병으로 고생하시는 독거노인에게 더 없이 고마운 치료비가 된다. 또는 월세 집에서 쫓겨나게 생긴 가난한 집에 도움이 되어 위기를 극복하는데 한 몫을 하는 등 그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그야 말로 군중들은 속옷 두벌이 있는 사람은 한 벌도 없는 사람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나누어 주고, 그 나눔으로 스스로 더 큰 행복함을 느끼는 진정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노동 사목의 성격상, 만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과 근로 빈곤층 사회적 약자들이 많다보니, 시혜적 차원의 나눔도 중요하고 필요 하지만, 우리사회는 언제까지 이 시혜적 나눔에 머물려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법대로 정하여진 고용이 안정되고 노사가 합의하여 결정된 임금을 정당하게 일한 사람에게 지급하는 것은 제도적 권리이며 나눔의 더 큰 형태가 아닐까? 힘 있고 더 많이 가진 쪽이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더 많은 것을 착취하려고 한다면 함께 살아야 하는 우리사회는 갈등과 충돌에서 벗어날 수 가 없을 것이다.
어느 사회이든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불우이웃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생길 수밖에 없는 근로 빈곤층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나, 적극적으로 그 수를 줄여야 하고,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아기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먼저 실천하는 것이 그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게 한다는 믿음이 필요한 것 같다. 적당한 시기에 가지고 있는 약간의 것을 내어놓음에 머무르지 말고, 어려운 이웃들이 사회 보장 제도로 희망이 꺽이지 않고 살아 갈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앙의 행위’ 라고 한다면 너무 과도한 것일까? 근본적 문제를 보기에는 너무도 아프고 힘이 드니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 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어렵고 힘들어하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은 희망과 용기를 주려 오신다. 그래서 우린 성탄을 기다린다. 이 힘든 시간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길 너무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