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조건

가톨릭부산 2015.10.27 18:31 조회 수 : 41

호수 1963호 2008.11.02 
글쓴이 김 루시아 수녀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기억하는 11월! 필리핀에 도착하여 카타리나 수녀원에 머물면서 어느 묘비 앞에 쓰여 진 "오늘은 나 내일은 너" 라는 말을 묵상했다.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 수녀원은 할머니나 환자 수녀님이 많으셔서 어느 달은 다섯 분이나 돌아가셨다. 그래도 동료 수녀님들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떠나시던 수녀님들의 죽음은 너무도 평화스럽고 행복스러웠다. 그러나 수녀원을 떠나 도시빈민들이 살고 있는 나보따스에서는 가엾은 죽음을 많이 보게 되었고 특히 가르치던 꼬마가 사고로 떠났을 때는 그 옛날 부산에서 겪은 아픔이 생각났다.

오래 전 부산 서대신동 마리유치원에서 소임을 할 때 스승의 날 카네이션을 들고 할머니와 유치원으로 오던 가브리엘은 마주 오는 자가용을 피해 담 벽에 기대섰는데 어린이를 보고 당황한 초보 운전자가 엑셀을 밟으면서 6살 꼬마를 하느님 나라로 보냈다. 소식을 듣고 병원에 달려가 보았으나 묵주를 손에 걸어주는 것 외에는 넋 나간 할머니를 위로하지도 못하고 돌아와 갑자기 닥친 슬픔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가족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몰라 주님만 찾았다. 며칠 후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할 때는 유치원을 휴원하고 학부모와 어린이들이 참석하여 꽃 관에 실린 가브리엘을 울음바다 속에서 하느님 나라로 보냈고 장지에서는 자식을 가슴에 묻던 아버지가 관 위에 쓰러져 오열을 토하고 할머니는 "내가 잘못했지! 내 탓이여" 라는 말만 반복하며 울지도 못하던 슬픈 날이었다. 

수감된 운전자는 젊은 엄마였고 여러가지 조건으로 남편을 통해 백배 사죄하며 합의를 청해왔으나 현장에 계셨던 할머니는 어떤 조건도 거부하셨다. 그러면서 석 달을 보낸 어느 날 할머니가 수녀원을 찾아와 "수녀님! 가브리엘은 하느님 나라에 갔겠지요? 내가 신자인데 합의를 안 해주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슬퍼하시겠죠? 그래서 한 가지 조건을 받아드린다면 용서해주려고 해요" 하시며 지치도록 우셨다. 그 합의 조건은 비신자인 운전자가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숙제를 하셨던 할머니가 삶 속에서 기억되며 "굶주리고 목마른 형제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마태25장, 40절)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할머니의 숙제를 축복으로 갚아주셨을 것이다.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고 빈손으로 떠나야하는 우리의 삶! 그러나 빈손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에게 주님을 뵈옵는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호수 제목 글쓴이
2879호 2025. 7. 20  “농민은 지구를 지키는 파수꾼이자 하느님의 정원사입니다.” 서현진 신부 
2878호 2025. 7. 13  노년기의 은총 윤경일 
2877호 2025. 7. 6  그대들은 내 미래요, 내 희망입니다. 이나영 
2876호 2025. 6. 29  주님 사랑 글 잔치 김임순 
2875호 2025. 6. 22  “당신은 내 빵의 밀알입니다.” 강은희 헬레나 
2874호 2025. 6. 15  할머니를 기다리던 어린아이처럼 박선정 헬레나 
2873호 2025. 6. 8  직반인의 삶 류영수 요셉 
2872호 2025. 6. 1.  P하지 말고, 죄다 R리자 원성현 스테파노 
2871호 2025. 5. 25.  함께하는 기쁨 이원용 신부 
2870호 2025. 5. 18.  사람이 왔다. 김도아 프란치스카 
2869호 2025. 5. 11.  성소의 완성 손한경 소벽 수녀 
2868호 2025. 5. 4.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하십시오. 김지혜 빈첸시아 
2865호 2025. 4. 13.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안덕자 베네딕다 
2864호 2025. 4. 6.  최고의 유산 양소영 마리아 
2863호 2025. 3. 30.  무리요의 붓끝에서 피어나는 자비의 노래 박시현 가브리엘라 
2862호 2025. 3. 23.  현세의 복음적 삶, 내세의 영원한 삶 손숙경 프란치스카 로마나 
2861호 2025. 3. 16.  ‘생태적 삶의 양식’으로 돌아가는 ‘희망의 순례자’ 박신자 여호수아 수녀 
2860호 2025. 3. 9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사순 시기 담화 프란치스코 교황 
2859호 2025. 3. 2  ‘나’ & ‘우리 함께 together’ 김민순 마리안나 
2858호 2025. 2. 23.  예수님 깨우기 탁은수 베드로 
주보표지 강론 누룩 교구소식 한마음한몸 열두광주리 특집 알림 교회의언어 이달의도서 읽고보고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