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519호 2018.12.16 
글쓴이 박주영 첼레스티노 

제 마구간에 말구유가 있었으면…
 

박주영 첼레스티노 / 남천성당, 언론인 park21@chosun.com
 

   12월. 한 해의 끝자락입니다. 얼마 전 1월 달력을 넘긴 것 같더니 달랑 한 장 남아있습니다. 그것도 절반 이상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흘러 버렸습니다.
   연말은 바쁩니다. 송년회다 동창회다 가야 할 곳이 많아집니다. 술자리도 빈번해집니다. 국내외 10대 뉴스 뽑는데 투표도 해야 하고 올해 가장 많이 불린 노래, 제일 인기 있었던 드라마 등을 선정하는 TV 프로그램도 봐야 합니다.
   다들 “경제가 안 좋다”고 아우성이고 ‘부산 주택시장 붕괴 우려’ 등 우울한 뉴스들이 많습니다. 집에선 “늦둥이 딸 놔두고 어떡할라고 담배도 안 끊냐?”, “남들처럼 땅 사둔 것, 재산도 많지 않으면서 술은 왜 그리 퍼마시냐”는 바가지가 융단 폭격처럼 쏟아집니다. 간헐적 저항을 해보지만 건지는 건 별로 없습니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다 바쁘고 고단합니다. 그러다 문득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게 정지된 순간 같은 것이 옵니다. “벌써 1년이 다 지났네. 참, 허망하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마음 속을 배회합니다. 연말의 회한쯤 되겠습니다.
   그런데 교회력은 ‘한 해의 시작’을 알립니다. ‘대림절’이지요. 세상은 ‘끝’인데 교회는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신앙의 시간은 서로 다른 가 봅니다. 세속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가 다르듯이.
   연말을 앞둔 요즘의 제겐 ‘끝과 시작’이 뒤섞여 있습니다. 제 올해의 ‘끝’은 어수선하고 우울하고 처량합니다. 마치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마구간’과 비슷합니다. 루카복음사가는 얘기합니다. “드디어 첫 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루카 2,7)
   ‘새 시작’의 중심엔 아기 예수님이 계십니다. 제 연말, 제 마구간엔 아기 예수님을 모실 말구유가 있을까요? 제 끝의 시간이 새로운 시작의 시간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어수선하고 우울하고 처량하더라도 ‘말구유’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주보 화답송에 있었던 시편 구절이 떠오릅니다. “저희 날 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저희 힘이신 주님…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이시옵니다”. 저와 저처럼 연말을 맞을 모든 이들의 말구유를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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