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구장 강론
 
2018.3. 31. 주님 부활 대축일성야미사
 
           Amore e saper perdere

 
찬미예수님, !!,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부활시킨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주님부활의 은총과 축복을 충만히 내려 주시길 빕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은총이 우리나라와 세계 모든 민족에게도 내리길 빕니다. 특히 고통받는 형제들에게 부활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히 내려주시길 빕니다.
 
오늘밤, 주님부활을 기리며 기뻐하는 이유는 주님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신앙을 1코린15장이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5,16;22)
이 부활신앙은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엊그제 성목요일..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만일 우리가 십자가를 피하면, 부활을 피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부활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루카24,25에서 이 진리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 일년 중 가장 거룩한 이 부활성야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면서, 부활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주님부활의 신비를 올바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령께서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깨닫게 해 주시고, 주님부활의 신비로 인도해 주시길 빕니다.
 
그럼, !!,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십자가 죽음을 마치 그림처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세족례입니다. 요한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세족례를 합니다. 세족례를 하는 이유를,.. 주님의 속마음을 요한복음은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사실, 주님은 일생 당신의 제자들을 항상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오자 주님께서는 일생 보여주신 사랑을 아주 강력하게, 최고도로 보여주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끝까지 사랑하셨다.” 라고 합니다. 끝까지,, 완전히 사랑하는 표시로 세족례를 하신 것입니다.
 
발을 씻어주는 일은 노예가, 종이 하는 일입니다. 옛날 주인이 밖에서 돌아오면, 종들이 와서 제일먼저 주인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세족례는 주님께서는 노예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세족례를 통하여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남김없이, 완전히, 끝까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주님의 사랑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세족례를 통하여 하느님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분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잘못을 들먹이면서 겁을 주고 독재하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인간을 종처럼 섬기는 분입니다. 우리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어머니처럼 먹이고 입히고 위로해 주시며, 보듬어주시는 한없이 인자한 하느님이심을 세족례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요한14장을 보면, 세족례를 마치고 주님께서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갈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들은 필립보 사도가 예수님께 하느님 아버지 얼굴을 보여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14,9)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세족례를 통하여 보여주신 자비롭고 겸손한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신음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마르 15,29~32)
이 조롱은 사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을 구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먹였고, 치유해 주었고, 살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목숨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남은 구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십자가의 주님이 바로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하느님은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무능한 분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서는 당신 아들까지 아낌없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목숨을 바치셨고 바로 그 몸을 이제는 우리에게 성체로 주시는 것입니다.
1요한4장은 인간이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너무나 겸손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0;16)
 
이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참된 생명임을 부활로써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족례와 십자가로 보여주신 하느님의 자비롭고 겸손한 사랑은 죽음으로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이기는 참 생명임을 부활로써 증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부활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지극히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주님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분안에, 그분의 사랑안에 우리의 참생명이 있음을 부활로써 증명한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을 로마1장이 말합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4)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도 부활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이 믿음은,, 주님과 함께,, 주님과 일치해서 세족례와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말씀과 성체로써, 당신이 주시는 은총으로 1코린13장의 참된 사랑을 살게 합니다. 이 사랑이 바로 부활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3,4~7)
 
바로 이 참된 사랑이 이기심을 지닌 우리를 주님과 함께 죽게합니다. 죽게 하는 이유는 참된 사랑은 오만한 우리를 참으로 겸손하게 하고 나의 이익이 아니라 남의 이익을 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오로지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우리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비우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가난과 비움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낮은 자리를 원하고,,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에 대해서는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우리 힘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고 성체를 모시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일치해서 참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손해 볼 줄 알고, 양보할 줄 알고, 가난해 질줄 알고, 자신을 비울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빈 마음에 성령이 오시게 됩니다. 우리 영혼은 성령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주님을 부활시킨 성령께서는 이제 우리를 성화시키고 주님과 함께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성화와 부활의 과정은 우리 일생을 통해 일어납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게 합니다. 그리고 섬기는 사랑, 겸손을 지니게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힘으로 겸손하고 섬기는 사랑을 지닌 우리는 예수님과 한몸을 이루어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입니다.
 
이렇게 주님부활로 오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주님과 일치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치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한분의 아버지를 모시고 서로 사랑하여 일치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의 열매요 천국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일치를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요한11장이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11, 51~52)
따라서 일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진정으로 부활의 은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분열을 일으키면, 부활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공동체와 가정을 일치시키고자,, 고통을 감내하고 마음을 비우고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성령이 오시어,, 이미 부활의 생명이, 그 평화와 기쁨이 이미 이세상에서부터 자라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평화와 축복이 우리에게 가득하길 빕니다:
 
“부활하신 주님,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당신부활로써 우리 마음에,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사회에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소서.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께서 세족례와 십자가로 보여주신 사랑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교회와 형제들을 섬기게 하소서. 섬기고 봉사하기 위해서 낮은 자리를 원하게 하시고, 참고, 양보할 줄 알고, 손해볼 줄 알게 하소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가진 것을 잃어버릴 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가난하고 빈 마음에 성령으로 가득채워 주소서. 그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부활시켜 주소서. 그 부활의 힘으로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 일치의 길을 걷게 하소서. 어머니 마리아여, 주님을 위하여 일생 잃어버린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도 잃어버릴 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직 사랑만을 남게 하소서. 주님과 함께 그 사랑으로 부활할 수 있도록 전구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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