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046호 2010.04.25 
글쓴이 노영찬 신부 

일상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노영찬 세례자 요한 신부 / 부산가톨릭의료원장

지금은 아득히 오래된 기억으로 낡은 사진처럼 가물가물해졌지만, 어릴 때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해가 저물 무렵, 각 집에 저녁식사가 차려지면서 동네는 한순간 부산해집니다. 식탁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 이름을 부르는 목청들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기 때문이지요. ‘영찬아!’ 만화방에서, 골목 한구석에서 놀이에 몰두하던 저를 찾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셨던 부모님은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그 목소리에 담겨 있던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들게 고생하며 마련한 음식을 자식에게 먹이려는 어버이들은 이렇게 자식들의 이름을 불러 그들을 생명의 식탁으로 모읍니다.
오늘 복음에도 이런 심정으로 이름을 부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들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요한 10, 3). 목자와 양들 사이에 이뤄지는 이런 광경은 삭막한 도시문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낯설지만, 양들이 각자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 이름을 정겹게 불러주는 목자가 있고, 게다가 그 목자의 목소리를 즐거이 알아듣는 양들의 모습이 훈훈하게 다가옵니다. 바로 이 포근한 정경 안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 우리를 매일 살게 하는 생명의 흐름이 보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낳아주고 길러주며 사랑해주는 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 이 목소리를 듣고 응답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행동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이고 과정이며 결과입니다. 나를 부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살아 있는 연결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물론 이 소통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같은 존재등급인 사람끼리도 서로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목소리만 크게 질러 대는데,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그 고유한 존재 치를 존중하며 정성스럽게 부르면, 그 목소리에 하느님의 부르심도 함께 있다는 것! 이 하느님의 목소리가 어둠과 혼돈으로 방황하는 어리석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큰 울림으로 퍼져야 함을 각성하는 것! 오늘 기념하는 성소주일은 이런 부르심을 자질구레한 내 일상에서 찬찬히 경청하면서 충만한 삶을 일구자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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