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4. 연중 제 2주간 월요일(대리구미사)
① 1사무 15,16-23 ㉥ 마르 2,18-22
말씀의 보편성과 실천
!!, 오늘 이 대리구 미사에 오신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길 빕니다. ‘주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 오늘 주님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길 빕니다.
!!, 지난 10월부터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묵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지난 묵상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 말씀에 대한 묵상을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제일 먼저,,, 성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았습니다. 교회의 모든 전례와 기도의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이죠.. 사실 말씀의 전례는 모두 성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성무일도서도 성독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기도와 중요한 기도는 성독에서 따온 성경구절로 이루어진 기도입니다. 이렇게 성독이 모든 기도의 바탕이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기도생활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말씀은 그 자체로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구원의 능력을 뜻합니다. 그 절정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성모님을 통하여 인간으로 강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님은 영원하고 유일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마치 만개된 꽃처럼 나타난 하느님 사랑이 바로 참된 생명입니다. 따라서 말씀이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랑으로 완전히 나타났고, 사랑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성조부들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수많은 방법으로 수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결국 예수님이라는 영원한 말씀,, 유일한 말씀을 하기 위해서 준비한 것에 불과합니다. 지난 11월말에는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말씀이신 주님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어떻게 완성하셨는지 예로 들어 설명드렸습니다. 즉 구약의 율법과 십계명 → 황금률 → 사랑의 이중계명 → 새 계명 → 일치로 발전하면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은 먼저, 하느님 말씀의 보편성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계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와 대상은 보편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시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저는 요한묵시록을 읽고 있습니다. 요한묵시록은 초대교회 박해받는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 씌여졌습니다. 이 성경은 박해받고 순교해야 하는 신자들이 참으로 복된 사람임을 증거합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승리하여 천국의 지복직관을 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와 반대로 지금 권세가 있어 박해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 번째 죽음 즉 하느님과 영원히 결별하여 끝없는 고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죠.. 지금 이 세상의 역사는 선과 악의 싸움이지만, 결국은 선이 이긴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죠... 지금은 주님을 믿는 우리가 무지막지한 거대한 악의 권력 앞에서 그야말로, 힘없이 죽어가지만, 우리 안에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우리는 승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희망을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묵시록은 2천년전,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을 악의 세력으로 보면서 선과 악의 싸움을 설명합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역사의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보편적인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악의 세력인 로마제국이 없지만,, 악의 세력은 돈과 쾌락을 통하여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요한묵시록은 2천년 전의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그 내용은 지금의 모든 교회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이것이 하느님 말씀의 보편성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일어난 때의 역사적인 상황과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전해지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그 언어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 말씀의 참 뜻을 알아들을 때, 하느님 말씀의 보편성이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적어도 기초적인 성경공부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가톨릭교회 신자로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말씀을 당신 교회에 맡기시고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하느님 말씀의 참뜻과 보편성을 교회는 권위를 가지고 올바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비추심을 받고 있는 교회의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면서 신앙의 전승과 함께 성경을 오류없이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도권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개신교는 성경을 그토록 중요시하면서도 일치하지 못하고,,, 수백개의 교파로 분열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느님말씀의 보편성을 묵상하고 난 다음, 이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생활말씀임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철학적인 개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죠... 주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도록 말씀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말씀을 공부하고, 분석하고, 묵상해야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결국은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할 것을 목표로 말씀하십니다.
창세12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 당신이 일러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때 아브람은 하느님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하느님말씀을 실천에 옮겼을 때,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은 삶 속에서 실천할 때,, 그때부터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이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복음은 전체가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할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 복음서는 작고 간단한 책이죠. 이 작고 간단한 책은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한 구절, 한 구절,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말씀들로 이루어 져 있습니다. 삶을 위한 말씀, 이것이 하느님 말씀의 특징 중에 특징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대상으로 삼습니다. 문제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지만 그 내용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으면서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잘못입니다. 만일 우리가 요리하는 공부를 하고 나서 맛있는 요리를 해 먹지 않으면 그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와 같습니다. 사실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많이 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복음에 보면, 악마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마르5,7을 보면, 악마가 예수님을 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큰소리로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고백하지만, 악마는 예수님을 섬기고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당신말씀을 실천하라고 하신 점을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