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구장 강론

2016. 3. 22. 성주간 화요일(대리구미사)

① 이사 49,1-6        ㉥ 요한 13,21ㄴ-33.36-38.

 

     성주간과 십자가의 영광

 

!!, 일년중 가장 거룩한 한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엊그제 주님의 수난성지주일부터 부활대축일 한주간을 성주간이라 부릅니다. 이 성주간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사건을 전례로써 거행하는 주간입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거룩한 성주간을 맞이하여 오늘은 기도에 대한 묵상을 잠깐 중단하고 성주간과 오늘 복음에 대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주님수난성지주일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성지가지 축성과 행렬을 합니다. 그리고 일년중 가장 긴 수난복음을 낭독합니다. 이 수난복음은 단지 주님의 고통과 죽음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주님의 전 생애의 절정이요 요약입니다. 따라서 수난복음은 주님께서 이루신 가장 깊은 구원사건의 신비를 보게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성주간은 성삼일에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성삼일의 첫날인 성목요일 오전에는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단의 일치를 나타내는 성유축성미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주님의 만찬 성목일미사가 거행됩니다. 성목요일은 사제들의 축일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신약의 사제직을 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목요일은 교회의 심장이 되는 두가지 성사, 성체성사와 신품성사가 제정된 날입니다.

 

이날 봉독되는 요한복음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주님은 일생 당신의 제자들을 항상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오자 주님께서는 일생 보여주신 사랑을 아주 강력하게, 최고도로 보여주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성목요일 복음은 “끝까지 사랑하셨다.” 라고 합니다.

 

끝까지,, 완전히 사랑하신 주님은 그 사랑의 표시로 세족례를 하시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체로 영원히 우리에게 남겨놓으시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십자가의 구원은총을 영원히,,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목요일 만찬미사가 끝나면, “나와 함께 기도하자!”라고 초대하시는 주님의 권고에 따라 우리는 밤을 새워 교대로 성시간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2천년의 전통입니다.

 

성금요일에는 일년 중 유일하게 교회가 미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십자가 위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미사없는 수난예식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전례로써 거행합니다. 이 수난예식은 제 1부 말씀의 전례, 제 2부 십자가 경배, 제3부 영성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수난예식을 통하여 요한8,28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완전한 계시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너무나 무능한 하느님이십니다. 이 십자가의 무능함으로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계시합니다. 하느님의 전능한 힘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는전능한 힘입니다. 당신의 힘을 이기적으로,, 자기를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지만, 우리의 죄를 한없이 용서하시는 자비롭고 전능한 분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제 성토요일 저녁, 부활성야미사를 거행합니다. 일년중 가장 엄숙하고, 거룩하고 긴 미사입니다. 이 미사는 4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1부는 빛의 예식으로서 불을 축복하고 부활초를 점화합니다. 제 2부는 긴 말씀의 전례입니다. 제 3부는 세례예식입니다. 초대교회는 일년에 한번 부활성야미사때 세례성사를 거행한 것이 지금의 세례예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세례의 은총은 죄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새생명의 은총입니다. 이때문에 부활성야에 세례를 집전하기에 가장 좋습니다. 제 4부는 성찬의 전례입니다.

 

이런 부활의 신비를 가시적으로 잘 드러내는 것이 부활초입니다. 빛은 성서적으로 보면 생명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부활성야 전례를 시작하면서, 모든 불을 끄고 난 다음,, 불을 축복하고 부활초에 점등하는 것은 어두움이라는 죽음에서 빛이라는 새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파스카 신비를 잘 상징합니다. 이런 부활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해 교회는 부활시기 동안 부활초를 켜는 것입니다.

 

!!, 이렇게 성삼일에 대한 간단한 묵상을 마치고 오늘 요한복음 13장에 대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복음은 주님께서 세족례와 성체성사를 세우고 난 다음의 일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에는 주님을 배신할 두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스와 그리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장담한 베드로의 배신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사도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모두 도망갔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배신과 주님의 죽음이 대비를 이루면서, 철저히 버림받는 참혹한 주님십자가 죽음의 그림자가 선명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요한복음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영광이라 합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영광이란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참혹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어떻게 드러났다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1요한 4,10이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성경은 주님의 죽음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완전한 계시라고 합니다. 여기에 주님죽음이 영광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실,, 주님의 죽음은 인간 죄악의 상징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의 증오심과 오만함, 제자들의 배신, 빌라도의 비겁함이 예수님을 죽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편에서 보면, 당신 자비의 상징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죽기까지 용서하시는 주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주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났다고 1요한4,10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1요한4,10의 말씀대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마치 만개된 꽃처럼 활짝 피어 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십자가죽음은 하느님사랑의 위대한, 완전한 계시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사건은 매일 일어납니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부족으로 매일 크고 작은 죄를 짓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죄악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겸손과 신뢰로써 우리의 부족함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비로소 구원자로서 활동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면,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만일 아프지 않으면 어떤 의사가 실력발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우리의 부족함과 죄를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생긴 그 고통을 주님께 봉헌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주님께 의탁한다는 것입니다. 아플수록 의사에게 더 매달리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부족하고 잘못이 많은 우리가 바로 그 잘못 때문에 스스로 주님을 멀리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회개하는 마음으로 더욱 겸손하게 주님께 매달리고 더 가까이 간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고통을 당신의 십자가에 합하여 성부께 봉헌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바로 우리의 주님으로 영광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이심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구원의 은총과 축복이 이 성주간 동안 우리에게 가득히 내리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