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셨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이제는 그 따르는 무리를 찾고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위로하시고 평화를 주고자 하신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 27). 세상의 평화는 세상적인 것인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평화, 세상의 것에 의해 촛불처럼(?) 흔들리는 평화이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는 두고 가야 하는 평화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이루어진 평화(콜로1, 20)이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로마 5, 1)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 받고, 내가 하느님 앞에서 새로운 인간이 됨으로써 갖는 평화이다.
이 평화와 함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숨을 불어 넣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심과 함께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과 용기를 주신다는 의미이다. 지금 이 순간 제자들을 가장 두려워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스승을 죽인 백성의 지도자들이 두려웠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닐까? 그들을 가르쳐 주시고 길러주신 스승, 그들 모두가 죽음까지도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지만 도망친 그들이다. 그들의 배신과 나약함과 비굴함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숨을 불어넣어 새 인간이 되게 하시고(창세2, 7), 성령과 함께 용서를 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제자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신들과 모든 이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용서가 바로 제자들이 나아가야 할 참된 길임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고해성사도 여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고해성사 때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은 사제에게 용서를 받는 것은 하나의 시작이다. 그 완성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 이루어진다(마태 18, 35). 이렇게 고해성사가 이루어졌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고자 하셨던 참 평화가 나에게도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