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

가톨릭부산 2015.10.08 06:11 조회 수 : 18

호수 1992호 2009.05.10 
글쓴이 홍경완 신부 

가지에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을 제 때에 주는 것도 아니고, 거름을 적당히 주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우선적인 조건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나무로부터 수분도 공급받고 영양분도 얻어낼 수 있다. 그게 기본이다. 그것 말고 다른 것들은 다 부차적인 조건들이다.

그런데 우린 그걸 쉽사리 잊어버린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나서 나머지 조건들만 생각한다. 온도를 생각하고, 수분을 생각하고, 영양분을 생각한다. 그게 열매를 맺기 위한 더 우선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당연하다고 여긴 그 첫 번째 조건을 뇌리에서 지워버린다. 그러다가 가지에 붙어있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가지들을 보면서, 그 당연하다고 여겼던 사실이 실은 당연하지 않음을 새삼스레 발견한다. 그제야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우친다.

그 당연하지만 잊어버리기 쉬운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는 포도나무의 그림으로 쉽게 풀어주신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듯 가르쳐 주신다. 그 가르침에 진리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그 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것이다. 맞다. 신앙은 본디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느님께 여는 수동적 행위이며, 그 분을 붙잡고, 그 분께 매달리며, 그 분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행위이다. 그렇다고 이 머무름이 그저 수동적이지는 않다. 가지는 나무에 그저 붙어있지만 않기 때문이다.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물을 빨아들이도록 뿌리를 재촉한다. 그게 나무와 가지의 관계다.

가지의 이 행위는 나무에 붙어 있다는 면에서는 그저 수동적인 행위이지만, 그 내용은 엄청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행위이다. 머물러 있되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음은 단순히 눌러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주고받음의 유기적인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분이 그냥 놔두지 않는다. 그게 진정한 머무름이다. 그렇게 머물러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 열매에 대해서는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 잘 나와 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 21∼22). 이런 열매들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참 좋겠다.

호수 제목 글쓴이
2888호 2025. 9. 14  나를 죽이고 십자가를 지는 삶 file 박재범 신부 
2887호 2025. 9. 7  더 크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file 이재원 신부 
2886호 2025. 8. 31  행복을 선택하는 삶 file 박호준 신부 
2885호 2025. 8. 24  ‘좁은 문’ file 이영훈 신부 
2884호 2025. 8. 17  사랑의 불, 진리의 불 file 이영창 신부 
2883호 2025. 8. 15  마리아의 노래-신앙인의 노래! 김대성 신부 
2882호 2025. 8. 10  그리움, 기다림, 그리고 깨어있는 행복! file 김대성 신부 
2881호 2025. 8. 3  “만족하십시오.” file 이재혁 신부 
2880호 2025. 7. 27  “노인(老人)=성인(聖人)” file 정호 신부 
2879호 2025. 7. 20  마르타+마리아=참으로 좋은 몫 file 이균태 신부 
2878호 2025. 7. 13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file 계만수 신부 
2877호 2025. 7. 6  말씀 전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 file 정상천 신부 
2876호 2025. 6. 29  흔들린 고백 file 천경훈 신부 
2875호 2025. 6. 22  새 계약 file 신문갑 신부 
2874호 2025. 6. 15  하느님의 얼굴 file 조영만 신부 
2873호 2025. 6. 8  보호자시여, 저희의 닫힌 문을 열어주소서! file 권동국 신부 
2872호 2025. 6. 1.  승천하신 예수님, 저희도 하늘로 올려 주소서 file 이상일 신부 
2871호 2025. 5. 25.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file 맹진학 신부 
2870호 2025. 5. 18.  예수님처럼 사랑하기 file 권동성 신부 
2869호 2025. 5. 11.  내 인생의 밑그림을 그리신 하느님! file 박규환 신부 
주보표지 강론 누룩 교구소식 한마음한몸 열두광주리 특집 알림 교회의언어 이달의도서 읽고보고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