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구장 강론

2016. 3. 15. 사순 제5주간 화요일(대리구미사)

① 민수 21,4-9                ㉥ 요한 8,21-30.

 

         청원기도(2)

 

!!. 오늘도 지난주 청원기도에 대한 묵상을 계속합니다. 지난주, 청원기도는 주님께 울부짖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기도라고 묵상했습니다. 이 내용이 루카 18장에도 나옵니다. 바로 고약한 재판관과 과부의 얘기입니다: 어떤 마을에, 정말 고약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우습게 여기는 고약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관에게 어떤 과부가 찾아와,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올바른 재판을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당시 재판관은 옛날 우리나라 원님처럼 행정권, 사법권을 다 가지고 있는 사또와 같은 최고권력자입니다. 이런 고을의 최고권력자에게 과부가 가서 청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예수님 시대 가장 보잘것없는 약자입니다. 남편도, 돈도, 백도 없는 밑바닥인생입니다. 이런 과부가 올바른 재판을 해 달라고 청했으나 재판관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이 오만한 재판관이 그 힘없고 가련한 과부를 너무나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매일 그 재판관 사무실로 출근을 한 것 같습니다. 매일 가서 올바른 재판을 해 달라고 졸라댄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재판관은 과부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카 18,1~5)

 

이 비유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 주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이 복음은 기도의 근본을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끝까지 하느님께서 필요한 은총을 주실 때까지 끝까지 졸라대면서, 지치지 않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방이 귀찮아서 들어주지 않고서는 못배길 때까지 끝질게 청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일상생활 속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동생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 한 동생이 어머니에게 무엇을 잘 얻어내는 기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운동화를 산지 얼마 안 되는데, 또 다른 새운동화를 하나 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어머니께 어떻게 했길래 그 비싼 새 운동화를 사게 되었노?”하고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생이 말하기를:

『“비결이 간단합니다. 어머니를 조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두손두발 다 들때까지 졸라대서 어머니를 못살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 어머니에게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하면, 어머니는,, “새운동화를 산지 얼마되었다고?? 무슨 새운동화라니.. 니가 미쳤나, 걸쳤나..” 하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손톱도 들어가지 않는 어머니에게 따개비처럼 딱 들어붙어서 조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밥먹을 때뿐 아니라, 화장실까지 따라다니면서 조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붙어서 졸라대기 시작한지 3~4일이 지나면, 어머니는 그만 두손 들고 만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피곤하고, 너무나 귀찮해서, 따지고 말 것도 없이 사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꼭 필요한 것은 어김없이 얻어내는 동생의 비결을 듣고, 저는 정말 우리의 기도가 이러해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복음적인 청원기도가 바로 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 그럼, 이런 기도를 통하여 누가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까? 하느님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변화하는 것입니까? 성경의 말씀은 인간이 알아듣도록 인간의 말로 쓰여졌기 때문에 다분히 비유적이고 인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이 진절머리가 나서 들어주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도록 졸라대서, 하느님이 변화되는 것이 기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기도할 때, 변하는 쪽은 우리입니다.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인자하신 하느님압바는 우리가 청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느님은 기도라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총을 받을 준비를 시키고자 합니다. 동시에 기도를 통하여 우리 믿음을 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통하여 변화하는 쪽은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얻을 때까지 끈질기게, 끝까지 주님께 매달리는 청원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 의탁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린애가 어머니께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래대는 것은 자기는 장난감을 살 힘이 없기 때문에, 장난감을 사 줄 수 있는 살 힘이 있는 어머니에게 매달리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압바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그 자비에 기대는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전능한 힘으로 해결해 주시고, 은총을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 청원기도를 통하여 우리 삶 자체가 변화를 일으킵니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교만함을 없애고,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면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내어맡기면 내어맡길수록, 주님께서 역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결과 내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던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내 삶이 바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Lex orandi, Lex vivendi의 법칙입니다. 즉 기도하는 법칙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내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체험이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합니다. 한번은 어떤 자매님이 제게 와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제게 시어머니가 있는데, 제가 젊었을 때부터 저에게 모진 시집생활을 시켰습니다. 이제 세월이 지나, 시어머니도 늙고, 저도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에, 힘든 시집살이는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어머니를 용서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때문에 고해성사도 많이 보았고, 피정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시어머니를 보면, 또 화가 나고,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이런 비슷한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악습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솔직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사랑하려고 하면, 강박관념이라는 병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그결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보면서, 우리는 더욱 괴롭고, 죄책감이 들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렇다고, 내 힘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포기한다면, 그것도 믿음의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믿지 않는 사람이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 힘으로 안되는 바로 그 점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마르 9,23을 보면, 마귀들린 자기 아들을 둔 어떤 아버지가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청하면서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하실 수 있으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바로 기도는 내 힘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힘을 믿고,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께서 해 주시기를 바라는 신앙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께 진심으로 울부짖고 매달리는 청원기도를 바치도록 합시다, 사랑하기 힘든 그 형제를 사랑할 맘도 없는 나에게 사랑할 맘부터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고통과 아픔이 올 때, 그 고통을 가볍게 해 주시도록 기도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 고통 뒤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순종할 수 있길 청하고 또 청해야 합니다. 또 우리보다 더 고통스럽고 힘든, 정말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그 수많은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이 기도의 은총으로 참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가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축복해 주시고, 또 축복해 주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