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내려올 때에

가톨릭부산 2017.08.02 10:35 조회 수 : 210

호수 2446호 2017.08.06 
글쓴이 김상효 신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김상효 신부 / 신선성당 주임

  영적인 충만함도, 마음의 평화도, 내밀한 기쁨도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행여 우리에게 그것들이 선물로 주어져 호사스러운 은혜를 입게 되는 날이 간혹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그저 선물일 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선물일 뿐입니다. 오아시스에 머무르기 위해 긴 사막의 여정을 계획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이란 그것이 그저 삶의 일상이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일상이든 서걱거리는 모래와 같습니다. 충만함에 대한 갈망이 클수록 더 깊이 서걱거리는 모래와 같습니다.
  일상이란 어색함이고, 고단함이고, 속 시원히 규정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서 매번 새로운 잣대를 찾아 헤매는 당황함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매번 만나게 되는 일상이란 견디어내는 것이고, 초막 셋을 지을 토대도 없고,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볼, 더구나 주님을 알아볼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 가만히 서 있으면 더 깊이 빠져버릴까 두려운 모래와 같습니다. 이 모래 위에서 우리의 삶이 이어지고, 우리 삶의 책임들이 수행되고, 우리 삶의 의미들이 펼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래는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산을 내려오는 이들의 심정은 아예 산을 오르지 않았던 이들보다 훨씬 더 먹먹할 수 있습니다. 산에 두고 온 것들은 때로 일상을 견디는 힘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일상을 더 지리멸렬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만, 두고 온 것이 현실인지 걸어갈 길이 현실인지 확인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길을 걷는 이들의 몫입니다. 꼭 내 발로 걸어본 뒤에라야 확인할 수 있는 진리 말입니다. 사실 산을 내려오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아직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이들은 산을 내려와 예수님과 함께 지난한 여정을 같이 걸은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체험하고, 부활을 체험하고 나서야, 그리고 자신들도 예수님이 걸으신 고난의 길을 겪은 후에라야 비로소 이 신비를 알아듣게 됩니다. 산을 내려오는 제자들은 두고 온 것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진리로 만들기 위해 서걱거리는 발밑의 모래를 견디어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일상은 때로 무의미하고, 건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영적인 소재이고, 진리를 담는 그릇이 됩니다. 일상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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