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896호 2025. 11. 2 
글쓴이 김경란 안나 
나를 돌아보게 한 눈빛
 
김경란 안나
수정성당 · 메리놀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 자원봉사자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마지막을 품기 위해, 호스피스병동으로 향합니다. 이곳에서는 매일 누군가의 마지막이 지나가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조용한 사랑이 머뭅니다.

   병동의 공기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용했고 익숙했으며 차분했습니다. 평소처럼 환자분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말벗이 되어 드리며 필요를 살피는 시간, 어느 방에서나 그러하듯 삶과 죽음이 아주 가까이서 숨 쉬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날 처음 만난 어르신은 말씀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말씀 대신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처음엔 그저 몸이 힘드셔서 말씀을 못하시는 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눈빛이 마음 깊숙이 파고 들었습니다.

   말이 아닌 눈빛으로 전해지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고마움, 외로움 그리고 어쩌면 묻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나요?” “당신은 이 삶을 진심으로 돌보고 있나요?”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마치 투명한 거울 앞에 선 듯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무뎌졌던 마음, 너무 익숙해져버린 ‘일’이 되어버린 돌봄, 진심보다는 책임으로 채워진 행동들까지도 말입니다.

   그 어르신은 말 한마디 없이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빛은 책망이 아니었고 따스한 호소였습니다. 그 눈빛 덕분에 저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단 한 사람의 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 끝자락에 선 그분의 시간을 내가 얼마나 경건하게 마주쳐야 하는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환자를 돌보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이 저를 치유하고 계셨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배웁니다. 호스피스의 길은 결코 끝이 아닌, 사랑의 완성하는 길임을.

   호스피스(hospice)는 죽음을 앞둔 환자와 가족이 남은 삶을 평안하고 품위있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돌봄이며, 삶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는 따뜻한 공간입니다. 치료의 목적이 ‘병을 낫게 하는 것’에서 ‘고통을 덜어주는 것’으로 옮겨가며,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서적·영적·사회적 아픔까지 보듬는 전인적 돌봄을 제공합니다. 그 목적은 ‘죽음을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삶답게’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도 돌봄의 대상이 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길에 그들이 외롭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것, 그것이 호스피스의 본질입니다.

   호스피스의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키며 내 삶 또한 배우고 다듬어 갑니다. 그 눈빛 하나로 내 무심함을 녹이고 초심을 일깨워 주신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호스피스 봉사는 누군가를 돕는 일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배우는 여정이었습니다. 환자분의 마지막 미소와 따뜻한 손길, 한마디의 감사가 제 마음에 열두광주리의 은혜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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