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동사목실무자연수(08/27-29)
[ 부임인사 ]
< 노동에는 국경도 인종도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
차 광 준 (다윗) 신부 / 부산본부 본부장
안녕하십니까? 천주교 부산교구 노동사목 본부장 및 가톨릭노동상담소 소장으로 새롭게 부임한 차광준 다윗 신부입니다. 2017년 이주노동사목 담당으로 노동사목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노동자와 함께 동반하는 사제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아 살아왔습니다.
처음 이주노동사목을 시작하였을 때에는 이주민들을 사목적 보살핌의 대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이주노동사목을 배워가면서, 이주민들은 단순한 사목적 보살핌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주민들의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하여, 베트남으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마치고 돌아와 김해와 울산 지역에서 다양한 경험과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노동사목 본부장이라는 자리는 저에게 생소한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오랫동안 준비해왔고 기다려왔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37년 동안 부산교구에서 노동사목을 펼쳐오셨던, 많은 신부님들과 활동가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노동 정신’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전임 본부장 신부님께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최근 노동사목 본부의 활동에서 주된 동반자들은 이주노동자들이었지만, ‘이주노동자’라는 말 자체가 그들을 차별하는 표현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노동에는 국경도 인종도 그 어떤 차별도 없다’는 말처럼, 노동사목은 이주민과 정주민을 구분하지 않고, 우리 사회와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하며 살아가는 교회 활동임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일치 안에서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친교의 영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노동자들 안에서 일치의 연대를 이루어 내고, 일치된 연대 안에서 다양한 노동자들의 고유한 노동 사명을 존중하고, 함께하는 노동사목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나를 따라라” (마태 4,19) >
김 진 호 (바오로) 신부 / 부산본부 부본부장
+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안녕하십니까? 8월 21일부로 노동사목 부본부장을 맡게 된 김진호 바오로 신부입니다. 바자울 소식지를 받아 보시는 모든 분께 하느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의 저는 아직 이삿짐도 정리하지 못하였고 또 업무 숙지도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다소 두서없겠지만 이 직무를 맡게 된 소회와 감상을 간략히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 노동사목 부본부장으로 가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아주 당황스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때때로 미래를 생각하면서 저의 사제 생활에서 대강 이즈음에, 이 자리를 맡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막상 그 현실이 닥치니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컸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무슨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 직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물음에 물음을 던져 보니 깨닫게 되는 것은 제가 속 빈 강정이라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나름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10,030원, 40시간, 52시간, 15일, 45일, 90일, 100일, 120일, 유급휴일, 연장근로, 도급, 주휴수당, 근로계약… 빠진 것들이 많겠지요? 부랴부랴 기초적인 용어들과 개념 단어들을 공부하고 머릿속에 정리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가라앉지 않고 조급한 마음이 커졌습니다. 예상치 못한 인사이동이었던지라 본당 생활 정리와 새 임지를 위한 준비를 병행하려니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인수인계 받던 날 몸무게를 재 보니 2kg이 빠져 있더군요).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뉴스를 시청했습니다. 그때 앵커의 목소리로 들려온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멍하니 앉아 있던 제 머리를 강하게 내려쳤습니다. 김용균. 김용균. 김용균… 강보경. 박선빈. 이선호. 정순규. 김 군. … 전태일 . … “퇴근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씁쓸했고, 후회되었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시작하며 숫자부터 떠올리고 공부했던 것일까. 나도 어느덧 자료와 통계에 매몰된 관료가 되어버린 것일까. 어느덧 사람을 잊어버린 것일까.
새 본당으로 발령받은 지 며칠 되지 않았던 올해 초, 알고 지내던 교우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왔었습니다. 냉담하던 교우이신데, 남편분이 직장에서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셔서 힘들어하고 계시니 신부님이 가주셨으면 좋겠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장례식장에 도착했고, 안내판에서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젊은 얼굴을 발견하고 빈소로 들어갔습니다. 자매님은 처음 보는 제게 안겨 한참을 통곡하셨습니다.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뒤이어 젖먹이 여자아이들 둘이 눈에 들어왔고,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눈을 들어 영정을 보는데, 웨딩사진이 영정사진으로 쓰인 것을 보고 또 한 번 심장이 찢겼습니다. 울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정신을 차리고 한 마디 건넸습니다. “자매님… 우리, 일어서야 하는 것 알고 계시죠? 충분히 슬퍼하시고, 때가 되면 꼭 일어나요.” 자매님은 고개를 끄덕이셨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함께 울었습니다. 그날 젖먹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짐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이 아이들과 함께하겠다고.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마음속으로 그 가족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여전히 준비는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저에게 희망을 줍니다.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던 갈릴래아 어부들을 불러 주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완전한 사람만을 뽑으셨다면 저는 지금 희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채워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불러 주셨으니, 도와주시겠지요. 이번에 그랬던 것처럼 중요한 것들을 잊어버렸을 때 제 머리를 때려 깨워 주시겠지요. 그러니 저는 그저 제 작은 마음만 가지고 이 길을 가 보겠습니다. 함께하겠습니다.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시는 주님, 저를 도우소서.’
[작별인사]
< 이제 동행하는 마음으로 >
이영훈 (알렉산델) 신부 / 선교사목국 국장
‘되돌아보면 길었지만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
18년 전 가톨릭센터 부관장으로서 노동사목과 이주노동자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긴 방랑(?)을 마친 노동사목은 ‘가톨릭센터’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영어와 베트남어 미사 그리고 노동상담과 무료진료소 ‘도로시의 집’ 등을 통해 노동자를 위한 사목을 더욱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어깨너머로 노동사목의 성장과 함께 헌신적인 봉사자, 활동가, 그리고 수녀님과 신부님을 통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성전 건립을 위해 떠난 3년 뒤, ‘만남’은 초량성당에서 다시 이어졌습니다. 가톨릭센터에서 이사 올 노동사목과 친구들을 위해 저는 본당 신부로서 ‘도로시의 집’과 화장실 공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당 공동체와 지역 공동체가 이들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나름 노력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인에 대한 우리 사회 안에서의 어색함은 그때는 더 컸습니다.
본당 신자들과의 4년의 인연이 마무리되던 해, 제가 가게 된 곳은 ‘노동사목’이었습니다. 초량성당 신부였던 제가 이제는 같은 장소에서 ‘노동사목 신부’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때 마음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또 3년이 지났습니다. 본당 신부로 4년, 노동사목 신부로 3년, 총 7년을 채우고, 초량성당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났습니다.
사상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오기 위해 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교구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노동사목만을 위한 공간, ‘노동사목센터’를 마련하였습니다. 공동체 또한 사상성당을 중심으로 양산, 웅상, 무거 공동체가 새롭게 생겨났고, 기존의 베트남과 영어공동체 외에도 동티모르공동체도 탄생하였습니다. 큰 선물인 베트남 신부님과 수녀님도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김해성당과 복산성당을 포함한다면, 매주 천 명이 넘는 친구들이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꽤 큰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제 길면 18년, 짧으면 10~14년이라는 노동사목과의 인연을 마무리하고 교구청에 왔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 은총은 ‘과거’라는 ‘기억’을 되돌아볼 때 잘 보입니다. 아직은 낯선 교구청에서 기도 중에 제 과거를 되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선의를 가진 이들의 도움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노동사목과의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동행의 시작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계속 동행하겠습니다.
‘연대와 전진’
<노동사목을 떠나며>
조 광 우 (엘리야) 신부 / 울산대리구 사회사목 담당
“일하는 인간, 살아가는 인간.” 사람의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주제이고, 신학생 시절에도 중요하게 여겼던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사제 서품을 받고서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일들에 사로잡혀 소홀히 여겼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부임한 노동사목 이었지만, 저에게는 ‘그동안 핑계를 대며 지나쳐왔던 이 일을, 이제는 제대로 마주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주님의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사제라는 이유로 한 발짝 떨어져 지내며, 뉴스와 추측만으로 바라봤던 노동 현장을, 특히 그중에서도 소외된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서, 교회가 실천하는 사랑이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난을 경험해 본’ 사람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가난을 경험해 본 삶이 아니라 가난한 삶이었지요. 교회의 삶은 ‘사랑을 실천해 본’ 삶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선 지금마저도 여전히 간접적 경험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제 생각과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랑의 지평이 넓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노사 간의 대립, 한국인과 이주민의 대립, 그 경계선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더 큰 사랑과 인내, 대화가 필요한 세상이었습니다. 노동사목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제 사목적 시야에 큰 변화를 준 이 자리를 떠나게 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느낍니다. 물론 앞으로도 완전히 떠나지는 않겠지만, 변화는 피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최대한 잃지 않고 간직하려 합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농부들과 어부들의 삶을 깊이 이해하시고 그 안에 복음을 담아 전하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바르게 기억하며, 앞으로도 그 선한 가치를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노동사목 가족들과 이주 공동체를 향하여, 저의 부족함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동 사목과 이주 공동체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노동사목이야기]
< 신앙이 주는 위로 그리고 공동체 >
유 동 현 (마르코) / 부산본부 노무팀장
비록 주일에 한 번 뿐이지만, 베트남공동체와 동반하면서 부끄러운 저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매주 주일미사에 500명이 넘게, 그것도 기쁜 발걸음으로 오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이주민이 되면 저렇게 기쁘고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신앙공동체가 주는 유익이 어떠한지 알고 있지만, 교회 바깥의 재미에 마음과 시선을 빼앗기기 십상이라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할 자신이 없다고 해야할까요? 타향에서 일을 하느라 몸이 매우 고단하고 한국문화에 적응하기도 바쁠텐데 꾸준히 주일미사에 오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하며 신기하게 친구들을 바라볼 때도 있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신앙이 주는 위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주민 공동체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구심점이 이 신앙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베트남공동체는 자신이 속한 지역별로 그룹이 존재합니다. 이들 그룹의 축일이 되면 미사와 모임 뒤에 항상 축일 축하 파티를 하는데 초대받아 가게 되면 베트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어려움, 신앙이야기 등 서툰 한국말로 제게 이야기해 주는 내용에 그리고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는 손길에 제가 치유를 받을 때도 많습니다. 이 때문에 신앙생활을 타향에서도 이어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리고 주일에 받은 위로와 힘을 가지고 흩어져서 일주일간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모습에서 교회의 역동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삶의 이야기들을 신앙공동체에서 풀어놓고 서로 위로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힘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한 주를 또 버티기 때문이겠지요. 공동체를 통한 신앙의 위로가 결코 작지 않음을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항상 깨닫습니다.
저는 노동사목에서 친구들을 대할 때마다 이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험난하고 그다지 이들에게 친절한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에 한국인으로서 미안한 마음도 있습니다. 노동문제를 상담하다가, 비자 문제를 상담하다가 여러 가지 한국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발견하면 많이 미안하게 됩니다. 이들의 편에 서서 문제를 완벽히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도 크지요. 저에게는 이들이 예수님이라서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앙울타리 안에서만은 환대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저의 기도지향에는 항상 이주민에 대한 지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황님의 기도지향들 안에서 이주민들에 관한 것이 나오면 좀 더 깊이 있게 이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친구들의 성당에 오는 가벼운 발걸음을 보며 오늘도 이들의 마음을 응원하고 곁을 내어주며 함께 걸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예수님 뒤를 따라가려고 넘어져도 시도해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이주사목이야기]
< 한국에서 이주민들과 함께 있음에 대한 나의 이야기 >
Quido Naikofi (마르티노) 신부 / 말씀의 선교 수도회(Societas Verbi Divini)
저는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살아온 지 19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 기간 (19년) 동안 관찰한 바에 따르면, 한국에는 네 가지 주요 이주민의 그룹이 있습니다. 즉, 한국인과 결혼한 이주민들, 국제 학생들 (유학생들), 난민들 (및 망명 신청자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입니다. 이 네 가지 이주민 그룹은 결혼을 위한 이유이고, 두 번째 그룹은 교육과 고등 학업을 위한 이유이고, 세 번째 그룹은 정치와 안전의 이유이며, 네 번째 그룹은 경제적 이유, 즉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의 복지와 생활 편의를 도모한다는 것이지요.
각 이주민 지원센터는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 상담, 법률 지원, 의료 지원 등 다양한 도움과 시설을 제공합니다. 한국 대학교들도 각 교육기관에서 유학생들의 복지와 편의를 위한 지원과 시설을 제공합니다. 현실은 대한민국이 한국 내 모든 이주민의 편의와 사회 복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이주민 집단 중에서, 아마도 이주노동자들만이 한국에서 살고 일하고 거주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는 이주민들일 것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는 이러한 불편함을 경험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직장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또한, 일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합니다. 그들이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한국어 능력인데, 특히 한국에 막 도착한 이주노동자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회사 사장님과 다른 회사 직원들과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자기 나라에서 한국어 능력 향상 과정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한국에 살면서도 근처 이주민 센터에서 제공하는 한국어 강좌 프로그램과 같은 시설과 지원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종종 의사소통의 오류와 오해로 인해 직장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또 다른 문제는 직장에서 고용 계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는 문제입니다.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면서도 급여, 근무시간, 휴일, 보너스, 업무 종류 등에 관해 상호 합의한 서면 계약을 준하지 않고, 심지어 제공된 기숙사조차 거주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고용주나 회사 직원이나, 심지어 동료 근로자로부터도 폭력(언어적, 신체적)을 겪는 이주노동자도 있습니다. 이는 이주노동자가 기존 근로계약을 유지하는데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불법으로 다른 곳에서 일하기 위해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도망치는 것을 선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이 법체계를 피해 도망가거나 불법(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일하게 되면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들은 한국 출입국 당국에 쫓기고 체포될까 두려워하며 살고 일해야 할 뿐만 아니라, 브로커(중개인)의 위협과 갈취도 견뎌내야 합니다. 상담, 미사, 기타 영적인 예배를 위해 이주민 공동체들을 방문할 때마다 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브로커로부터 강탈을 당한다는 불평을 듣습니다.
실제로 대부분 미등록 근로자는 일자리를 구할 때 회사 사장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 중개인을 통해 회사를 위해 일합니다. 중개인을 통해 일하기 때문에 월급은 회사 소유주에게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중개인을 통해 받습니다. 중개인은 매달 근로자 급여에서 10~20%를 공제합니다. 중개인은 이미 회사 소유주로부터 급여를 받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근로자들에게서 더 많은 금액을 공제해야 합니까? 이는 일종의 갈취 행위가 아닌가요?
미등록 근로자들은 이러한 관행에 저항할 권리가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출입국 당국에 의해 체포 및 추방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저항할 힘이 없습니다. 브로커들은 항상 이민법을 이용해 그들을 위협하고 침묵시킵니다. 그들의 인권은 철저히 침해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스럽더라도 이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좋아하거나 동의해서가 아니라, 변화를 위해 싸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수동적인 수용과 저항만이 고향 가족과 자기 미래의 행복을 위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고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추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이 살아남고 이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유일한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들이 이 상황을 좋아하거나 즐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단지 한국에서 살아남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그들만의 방식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도 누구라도 그들의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론 아니지요. 어쩌면 그들에게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자기 미래를 위해 살아남는 것이 유일하게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 상황을 웃으면서 받아들이지만 실제로는 가슴의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혼자서 고통을 겪는 것을 우리가 그냥 지켜보는 것은 매우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짧은 글을 통해 한국 내 이주민센터들, 특히 가톨릭이 운영하는 이주민센터에서 이 문제에 대한 사례연구를 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례 연구 결과는 당국에 제출되어 탐욕스러운 브로커들을 규제하는 데 활용될 수 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노동현장이야기]
< 600일의 고공농성 - 희망의 내일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며 >
김 도 아 (프란치스카) / 부산본부 사무국장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공장부지 옥상에서 시작한 고공농성이 1년 8개월, 600일을 채우고 끝이 났습니다. 2025년 8월 28일 오후, ‘이제부터 꽃길만 걷자’는 의미로 함께 싸우는 조합원들이 신겨준 새 운동화를 신고 드디어 박정혜 동지가 땅에 발을 딛었습니다. 세계 최장기간의 고공농성 기록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구미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불타버린 공장의 옥상에서 시작된 고공농성이 600일 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약 9m 높이의 옥상은 지상에서 가만히 바라보면 고공농성 노동자의 표정이 확인될 만큼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그 잡힐 듯 가까운 높이에서 한 노동자는 476일을, 또 다른 한 노동자는 600일을 지냈습니다. 언제든 내려올 수 있을 만큼의 거리 - 그곳에서 더위와 추위와 외로움을 그저 이 악물고 참고 참아낸 동지들입니다.
“이제 내려오니까 땅을 밟았다는 게 실감이 나네요.”
1년 8개월 만에 땅을 밟은 것을 내려와서야 실감한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은 “승리해서 내려왔으면 더 좋았을 거지만, 그래도 제가 이 두 다리로 내려오게 해 준 우리 동지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직 저희 투쟁이 끝난 게 아닙니다. 앞으로도 정부와 국회가 책임지고 저희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이상 고공에 오르는 이가 없길 바라며 우리 노동자들이 정말 행복한 세상 살 수 있게, 제가 바라는 건 그것입니다”라고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미의 해고노동자들이 고용승계를 요구하고 있는 평택의 한국니토옵티칼은 구미의 물량은 이어받았지만 7명의 노동자의 일자리는 없다고 말하여 그동안 교섭 요구에 단 한 차례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5만명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청문회를 열어달라는 국민 청원에 동의했지만 환경노동위원회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답답하고 초조한 상황들 속에서 고공에 홀로 남은 박정혜 동지는 점점 눈물흘리는 일이 늘어갔습니다.
다행히 정부와 여당이 옵티칼하이테크 문제 해결을 위한 당-정-노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교섭을 위한 국회 청문회를 열고, 외투기업 먹튀방지법을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하면서 고공농성을 해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긴 시간 힘들게 싸워온 7명의 조합원의 고용승계가 이뤄지는 날, 그날이 바로 승리하는 날이 될 것이며 그날까지 싸움은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유독 뜨거웠던 올해의 여름, 조금만 움직여도 어지럽고 힘이 들어 생수를 끌어안고 가만히 버티던 그가 내려오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또 다른 곳, 종로 세종호텔 앞 도로 위에서 200일 넘게 고공농성 중인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도 어서 땅을 딛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고공농성 선배(?)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처럼 지연된 희망은 반드시, 희망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 희망이 노동자들의 곁에 현실로 다가올 수 있도록 연대하겠습니다. 이 땅의 모든 노동자, 특히 아프고 위험하고 억울한 노동자들의 곁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일과 시선 ]
<평화>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 복직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장영식 (라파엘) / 사진가
[ 지난달 한 일 ]
▶ 전국 노동사목 실무자 연수 (8/27~29)
인천교구 태암 레오관에서 전국 노동사목 실무자 연수가 열렸습니다. 이번 연수는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라는 주제로, 서울·인천·부산에서 모인 참가자들이 하느님 품 안에 편안히 머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 일정으로 찾은 인천교구 역사관에서는,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힘쓴 선교사와 사제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며 한국 교회와 노동사목의 뿌리를 되새겼습니다. 이어 공동체 나눔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탐방과 미사봉헌을 통해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함께 길을 찾아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연수는 참가자 모두에게 노동사목의 소명을 새롭게 확인하고 힘과 위로를 얻는 값진 체험이 되었습니다.
▶ 이 외 활동
8/1(금) 의료지원 / 메리놀병원
의료지원 / 부산대학교병원
8/2(토) 양산베트남공동체 체육대회 / 메리놀병원
8/4(월) 의료지원 / 부산의료원
8/5(화) 서면시장번영회지회 중식 선전전 / 서면시장
차별금지법제정부산연대 회의 / 노동해방 마중
8/11(월) 의료지원 / 인제대학교 부산백병원
폭염 속 노동자 생명·안전보호 노동청 앞 1인시위 / 부산고용노동청
8/12(화) 중대재해없는세상만들기부산운동본부 준비팀 회의 / 부경울열사회
8/13(수) 중대재해없는세상만들기부산운동본부 집행위 회의 / 민주노총 이동상담소(센텀)
8/14(목) 의료지원 / 부산대학교병원
8/15(금) 부산베트남공동체 주일학교 소풍 / 해운대 아쿠아리움
8/19(화) 지구건설주식회사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2호 항소심 선전전 / 부산지방법원
심리치유모임 / 노동사목센터
의료지원 / 메리놀병원
8/20(수) 9.27 기후정의행진준비위원회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전국노동사목실무자회의 / ZOOM
의료지원 / 부산의료원
8/21(목) 본부장·부본부장 신부님 부임미사 / 노동사목센터
8/22(금) 노동사건지원 / 부산북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
8/27~29(수~금) 전국노동사목실무자연수 / 인천교구 태암 레오관
8/30~31(토~일) 부산베트남공동체 집행부 피정 / 송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