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가톨릭부산 2025.08.13 10:48 조회 수 : 13

호수 2884호 2025. 8. 17 
글쓴이 박신자 여호수아 수녀 

‘옛날 옛적에’

 
박신자 여호수아 수녀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회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신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셨지요? 저는 연세가 많은 부모님 덕분에 또래보다 더 많은 옛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 집의 이야기꾼은 주로 아버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유년 시절과 함께했던 산, 하늘, 강, 동물들을 실감나는 이야기로 만난다는 것이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바로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이제 백 세 가까운 연세가 되셨을 테니,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라면, 정말 ‘옛날 옛적’이겠지요.

   아버지의 고향 마을을 둘러싼 산에는 산신령과도 같은 호랑이가 살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산에 올라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어둑해진 산길을 서둘러 내려올 때면, 매번 그 호랑이가 나타나 아이들이 다른 산짐승에게 잡혀가지 않고 무사히 산을 벗어날 수 있도록 끝까지 따라와 주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서 바가지만 한 크기로 빛나던 호랑이의 눈을 틀림없이 봤다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저는 한 번도 ‘진짜예요?’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불안해하다가도, 자신들을 지켜주기 위한 호랑이의 존재가 마치 든든한 수호자처럼 느껴졌을 아이들의 묘한 안심과 따뜻함이 전해왔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또 다른 이야기들도 결국은 이와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오는 동물들을 위해 사람들은 따로 먹이를 챙겨두었고, 봄이 오면 동물들이 다시 그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 산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땅에는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부모님의 이 모든 이야기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즉 서로를 지켜주고 공존하는 공동체적인 연결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호랑이도 여우도 이젠 모두 멸종위기종이 되어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게 놀았던 어린아이들의 깊은 산속에는 이제 셀 수 없이 많은 펜션이 들어섰고, 빛이 나는 호랑이의 눈이 지켜주지 않아도 밤낮으로 밝은 조명이 가득한 도로가 뻗어 있습니다. 이제 정말이지 옛날 옛적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수도공동체에서 소임을 하러 가는 길에서도, 아버지의 옛 이야기를 떠올리곤 합니다. 본래라면 마을 어귀에서 당산나무로 깊게 뿌리를 뻗고, 그 뿌리만큼 넓게 가지를 펼쳐 바람과 햇살을 누리며 우뚝 서 있어야 할 팽나무가, 도심 곳곳에 큰 화분에 심겨 왜소하게 서 있습니다. 그 좁은 화분에 갇혀 있을 뿌리를 상상해보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인간의 볼거리와 편리를 위해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생명이 억눌려지는 풍경 앞에서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무심해집니다.

   오는 9월 1일부터 10월 4일까지 전 세계 교회 공동체는 ‘창조시기’라는 특별한 기간을 기념하면서 우리 공동의 집을 지키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합니다. 또한 우리는 공동의 집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동료 피조물이자, 하느님께서 만드신 만물의 일부임을 되새기며 ‘창조세계와의 평화’를 이루어갑니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공존의 정신이, 옛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늘 환하게 빛나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피조물이라는 선물을 귀히 여기며 정성껏 돌보는 협력자로서의 부르심에 힘차게 응답하는 창조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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