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880호 2025. 7. 27 
글쓴이 도명수 안젤라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걸으리라.

 
도명수 안젤라
토현성당 · 노인대학연합회 교육분과장


   내겐 일곱 살 유치원생 손자가 있다. 어느 날 밖에서 노는데 정신이 팔려, 집으로 오는 도중에 속옷에 큰 볼일을 보고 말았다. 울상이 된 아이를 달래 집으로 데려와서는 씻기는데 큰 덩어리가 욕조의 물구멍을 막아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서슴없이 손으로 집어 변기에 버리는데 더럽다거나 냄새가 역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우리의 부모님도 이보다 못하게 키우시지는 않았을 테다.

   시어머니께서 약간의 치매가 있으셔서 혼자 두기가 불안하여, 시골에서 모셔 왔지만 한사코 우리와는 같이 살지 않겠노라고 고집을 부리셔서 요양병원에 모셨다. 친정어머니께서 환갑도 채 넘기지 못하고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타고난 명줄이 짧아 그리 되셨다고 같이 울면서 위로해 주시던 어머니셨다. 5년을 외딴섬 같은 요양병원에서 삭혔을 외로움을 생각하니 죄송한 마음에 울컥해진다. 우리가 불편할까 봐 병원이 낫다고 하셨건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으니, 이미 초로에 접어들고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나이가 되어서야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된다.

   젊음이 무엇을 잘하여 얻은 상도 아니고 나이 듦 역시도 본인의 잘못으로 얻은 형벌도 아니다. 그들에겐 지식은 비록 빛이 바랬을지라도 살면서 터득한 지혜는 삶의 테두리 곳곳에 옹이처럼 박혀 있다. 간혹 전동차 안에서, 젊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하여 나이 든 게 벼슬이냐는 핀잔을 하는 속물들을 만난다. 집에 돌아와서야 그분들과 같은 편을 들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우리의 신앙 역시도 그분들의 몫이었던 형벌이 훑고 간 자리에 남겨진 보석이 아니던가. 존경받고 사랑받아 마땅하고 보살핌에 어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하여 그 누구도 타박해서는 안 된다. 검던 머리카락은 희어지고 얼굴의 주름살 사이로 세월의 땟국물이 덕지덕지 붙었건만, 그것은 희생당한 젊음의 대가라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분들이 계셨기에 우리의 오늘이 우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분들의 꿈은 우리였고, 꿈을 이루지 못한 자식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에서 낙마시키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픈 손가락이라며 감싸기만 하셨다.

   나의 미래를 보여 주시는 그분들께 감사와 존경을 표시하고, 수고를 삶의 미덕으로 삼으셨던 세상의 모든 조부모님들께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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