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다해) 강론 – 듣는다는 것
주임신부 2025. 7. 20, 덕계성당
우리 성당의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하다 보면, 참례하고 계신 신자분들 중에 누가 우리 본당 신자분이시고 누가 타 본당에서 오신 신자분이신지를 저로서는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생소한 얼굴이어서 그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사에 참례하시는 그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큰 특징은, 미사의 전반부인 말씀 전례 때에 우리 본당 신자분들은 독서 말씀을 귀를 열고 들으시는데, 타 본당에서 오신 분들 대부분은 귀가 아닌 눈을 열어 「매일미사」 책에서 그 내용을 보십니다. 마치, 독서를 선포하는 독서자가 그 내용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 확인하는 듯한 모습으로서, 그래서 분주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본당 신자분들께서는 미사 중의 말씀전례는 ‘보는 시간’이 아니라 ‘듣는 시간’이라는 전례적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계신 것임이 보입니다.
또 다른 특징은, 우리 본당은 미사 중에 해설자의 멘트가 거의 없는 반면 타 본당에서는 해설자의 멘트가 많은 점으로서, 그래서 우리 본당 미사전례는 물 흐르듯 흘러가지만 타 본당에서는 무언가 분주한 모습들이 연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타 본당 신자분들이 우리 본당 미사에 참례하시면 처음에는 분주하지 않은 그 모습에 당황하게 됩니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미사 중에 해설자의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들려야 편하고, 또 그것이 올바르다고 여기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도, 우리 본당 신자분들께서는 미사전례란 모름지기 분주하지 않고 깔끔한 가운데 모든 신자가 분심 없이 전례에 집중하며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계신다고 봅니다.
‘듣는다는 것’과 ‘분주하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이 둘은 다릅니다. ‘듣는다는 것’에는 집중이 필요하고, ‘분주하다는 것’에는 산만함이 따라옵니다. ‘듣는다는 것’에는 받아들이는 자세가 따르고, ‘분주하다는 것’에는 이런저런 행동들이 따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에서도 이 두 가지 자세가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루카 10,39)
오늘 복음 내용을 접하다 보면, 우리로서는 이런 의문이 들 수 있겠습니다. - ‘마르타는 열심히 일하고 마리아는 앉아서 놀고만 있는데, 왜 마르타만 주님으로부터 야단맞을까?’... 도대체 마르타에게 있어서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녀의 ‘분주함’입니다. 분주하다는 표현은 그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성경적 관점이 아닌 우리의 개인적 관점에서 볼 때, ‘말씀만 듣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리아가 정말 잘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우리는 가질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적 의문으로 복음의 초점을 흐려 놓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예수님 가까이 머물며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바라건데, ‘들음’에서 시작하여 ‘활동’으로 나아가는 그런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이 강론 내용을 ‘듣고’ 계신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의 주님 말씀으로써 이 강론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