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우순교자성지
박혁 신부
김범우순교자 성지사목
“우와, 여기 이런 데가 있었네.”
“미사는 매일 합니까?”
“공기가 너무 좋습니다.”
“밤에 안 무섭습니까?”
“피정도 합니까?”
“식사는 어떻게 됩니까?”
“버스는 갈 수 있습니까?”
처음 방문했다는 순례객, 무엇이 궁금한 순례객 분들이 많습니다. 또 성지순례 책자에 도장을 찍으러 오시는 분, 여러 번 방문하신다는 분, 아예 고정적으로 봉사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교님께서 몇 년 전에 인사발령을 내실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김범우 순교자가 시복 될 때까지 산에서 내려올 생각 마라.”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김범우 순교자는 조선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처음으로 박해를 받은 분이십니다. 비록 형장에서 순교의 칼을 받은 분은 아니지만,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귀양지에서 돌아가시기까지(장하치명)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신 분이십니다.
김범우의 집터는 모든 분들이 잘 아는 명동성당입니다. 조선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님이 명례방 김범우의 집터와 그 일대를 사들여 그곳에 최초의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지었습니다. 김범우가 살던 명례방의 집이 최초의 예배 장소이고 그곳에 최초의 성당이 세워진 것에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1785년 3월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 명례방 집에서 주일 행사(?)를 하던 중 추조(형조)에 적발되어 모두 체포되었으나 양반들은 모두 방면되고, 중인 신분으로 장소를 제공한 김범우만 문초를 받고 귀양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을사추조적발 사건이라고 합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신앙의 선조들을 찾는 과정에서 김범우 후손들의 증언과 후손들이 가지고 있던, 오늘날 주민등록에 해당하는 ‘호구단자’의 기록에 따라 현재 김범우의 후손들이 밀양에 살았으며 조상의 묘가 밀양 삼랑진 용전마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부산교구 교회사연구소에서는 묘를 발굴하고 법의학 감정에 따라 김범우의 묘로 비정(比定)하였습니다.
김범우 순교자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분으로, 최초로 예배 장소를 제공하였고 신앙을 굽히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잃었으나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얻은 분입니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을 원했고 하느님을 얻었습니다. 하느님만이 모든 것이니 우리도 그들을 힘껏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