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6일 사순 제5주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1년에 적어도 2번 이상 고해성사에 참여하기를 권고한다. 그런데, 그 고해성사 때에, 여러분 가운데 이제껏 자기가 무슨 죄를 지어도 자기가 지은 죄보다 더 큰 보속을 받으신 적이 있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찌 그 많은 나의 죄를 고작 얼마 되지도 않는 보속만으로 용서해주는 것일까? 신부가 실성해서 그런 것일까? 신부가 죄의식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자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울에 한 쪽은 나의 죄를 매달고 나머지 한 쪽엔 그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보속 몇 줄을 매달아도 하느님은 그것을 수평으로 만드신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인가? “에이 신부님, 그게 말이 됩니까?” 하시는 분들은 오늘 복음을 다시 보라. 오늘 복음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다시 보라. 오늘 복음에서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가 자신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 한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땅 바닥에 쓰러져 무수한 이들의 눈총과 죽음 직전까지의 두려움을 감당한 것, 그것 말고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다. 대성통곡을 하며 통회하고, 요란스런 결심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상으로, 공짜로, 일방적으로 여자 편을 드신 예수 덕분에 그녀가 살아난 것 같다. 마치 그녀의 사면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루어진 공짜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그녀는 분명히 간음의 죄를 저질렀고, 그녀는 그 죄 값을 치루지 않았다. 그녀의 죄값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저 한 말씀에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린 것일까?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이 단죄 받지 않은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눈을 휘둥그레 뜨게 할만큼 예뻤기 때문도, 그녀가 땅을 치고 대성통곡하며 뉘우쳤기 때문도 아니다. 그녀는 돌에 맞아 죽을 자신의 처지에 너무나도 절망해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하느님은 그런 그녀에게 다시 살라고 기회를 주셨다. 그녀를 단죄하지 않으신 대신, 예수님은 친히 단죄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온 정성을 다 하는 회개와 절실한 통회도 없이 그저 주절주절 나의 죄를 뇌까릴 때에도,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하나이다...’라는 사제의 사죄경이 들려올 때에, 그 사죄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그 순간은 결코 하찮은 순간이 아니다. 그 순간은 또다시 예수께서 당신의 피로 나의 죄를 지우시는 순간이다. 저 십자가에 나의 죄를 붙여 당신이 매달리시는 순간이다.
하느님은 간음하다 붙잡혀 온 그녀에게만 다시 살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에게도 다시 살 기회를 주신다. 다시 살 기회를 얻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제1독서를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해주셨다. 회개하며 죄를 뉘우쳤다면,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 43,18) 회개하여 죄를 뉘우쳤다면, 지나간 것은 지우자. 털어버리자. 그리고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내가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차라리 “쓰레기로 여기자.”(필립 3,8) 상처는 자랑할 것도 아니고 미움과 원망은 훈장 받을 것도 아니다. 그저 쓰레기다. 내 안에 든 쓰레기를 버려야 그리스도를 제대로 얻을 수 있고, 제대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잊지 말기를 바란다.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면, 하느님은 진정으로 용서하신다. 그리고 다시 살아보라 하신다. 하루라도 빨리 내 안에 있는 쓰레기를 말끔히 치우면서 말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 다가온다.
여러분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