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구장 강론

2016. 1. 19. 연중 제2주간 화요일(대리구미사)

① 1사무 16,1-13 ㉥ 마르 2,23-28.

 

           기도를 통한 주객전도

 

!!, 1월 18일부터 25일까지 하느님의 백성은 일치주간을 보냅니다. “모든이가 하나되게 하소서!”(요한 17,21) 라고 기도하신 주님 유언에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일치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주시길 빕니다. 또한 오늘 대리구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길 빕니다.

 

!!, 지난번 대리구미사에서 우리는 1요한4장의 “하느님은 사랑입니다...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계시되었음을 묵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 사랑은 몇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묵상하였는데..

첫째, 하느님 사랑은 자비롭고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고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셋째는 하느님의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이해타산 없이, 공짜로 한없이 베푸어주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사랑은 압바라는 호칭으로 요약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애가 자기 아버지를 부르는 너무나 정답고 친밀한 소리.. 압바는 하느님과 우리사이를 단적으로 계시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직접 하느님을 압바라고 불렀고, 또 우리에게 그렇게 부르도록 가르쳐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압바입니다. 이것이 지난 묵상의 요약입니다.

 

 

!!, 오늘 첫째 독서 1사무16장이 바로 기도에 대한 탁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자연스럽게,, 작년에 했던 기도에 묵상을 계속 하고자 합니다.

방금, 들은 1사무16장의 내용은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왕의 후계자를 물색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왕국을 건국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울왕의 뒤를 이을 새 임금을 찾기 위해 하느님은 사무엘예언자를 베틀레헴이라는 작은 마을로 보냅니다. 그 마을에 사는 이사이의 7아들 중에 하나를 뽑아 새 임금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무엘 예언자는 이사이의 7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7아들 중 장남 엘리압의 풍채가 좋은 것을 보고 이렇게 확신합니다: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그러나 주님은 달리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난 뒤,,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던 막내 다윗을 불러와서 새 임금으로 축성합니다.

 

오늘 묵상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사무엘 예언자는 장남 엘리압의 풍채를 보고, 새 임금으로 뽑으려 했지만, 하느님은 즉시 그의 외모만 보지 말라고 하시면서, 주님의 선택은 엘리압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좋다고 생각한 것은 인간적인 자기 생각이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달리 있었습니다. 바로 제일 어린 다윗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3천년전 사무엘 예언자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신앙의 은총을 받은 우리 모두가 하는 신앙체험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이 하느님의 뜻으로 변화되는 것은 기도 중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이면, 자신의 생각과 뜻이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으로 변화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기도는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신앙행위입니다. 이런 기도에 대한 저의 체험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소신학교에 들어가 15년동안 신학교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기간이 평탄치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성소가 흔들리는 위기의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때가 여러 번 왔습니다. 이럴 때마다 제가 한 것은 딱 한가지뿐이었습니다. 매일 정한 시간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서 주님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제 혼란스러운 마음을 말씀드리면,, 마음이 서서히 안정되면서,, 하느님의 뜻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정말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은총을 받았던 것입니다. 마치 안개가 끼인것처럼 흐리멍텅하게 보이던 제 길이,, 마치 고속도로처럼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기전, 성소에 대해서 혼란스럽고 복잡하였지만, 그런 제 인간적인 생각이 기도 후에 주님의 생각으로 단순하게,, 변화된 것입니다. 마치 오늘 사무엘예언자의 인간적인 생각이 주님의 생각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체험이 쌓이게 되면, 성소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감사함이 들게 됩니다. 제가 부족하다는 것은 저자신이 알고 세상사람이 다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부족한 저를 사랑하셔서 사제로 불렀다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태산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모든 신앙인이 체험하는 공통된 은총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신자가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밉고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경우에 없는 언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내마음을 바뀌는 수가 있숩니다...” 즉 주일미사에 가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면, 마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사를 보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 일이 무엇이라고,,,,, 내가 성체까지 영하고 주님과 한몸을 이루었는데,, 앞으로 되도록 잘 지내도록 해야겠다...” 물론 표현은 다르지만,, 이런 느낌을 받고 성당을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너무나 괘씸하고 사랑할 수 없다고 했는데,,,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린 후,, 내 생각에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사랑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기도생활이 자라면, 나중에는 오늘 사무엘예언자처럼, 더 명료하게, 더 즉각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 중에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까? 보통, 그리고 초창기에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받게 됩니다. 실제로 내 자신은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본래 나자신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주님을 마음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기도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 자신이 쬐끔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이 생각은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기도가 자라면, 어떤 경우에는 느낌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즉 주님 사랑에 대한 확신과 기쁨이 넘쳐 흐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과 느낌을 이냐시오성인이 가르치신 영의 분별로써, 올바로 식별하고 더 깊이 기도할 수 있도록 앞으로 두고두고 하나씩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기도를 하고 또 우리 기도가 올바른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목소리를 올바로 듣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또한 주일미사 같은 교회의 중요한 전례에 참례해야 합니다. 전례는 하느님백성이 공동체로 모여 하느님의 찬미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당신이름으로 모인 공동체게 올바른 믿음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나에게 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열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바로 이 기도의 은총과 축복이 내리길 빕니다.

“하느님의 아들 주예수 그리스도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