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생명을 살리고, 생명의 성숙을 도모하고, 생명을 보호하며, 생명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 그래서 교학상장敎學賞狀하는 교회이기 보다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일방적인 가르침과 그에 대한 무비판적인 순명을 마치 신앙생활 잘 하는 것 인양 이야기해 온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신앙생활의 기쁨을 빼앗고, 신앙생활을 마치 죄를 기워 갚는 삶, 의무만이 가득찬 삶,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하면 되는 삶, 율법과 계명을 곧이 곧대로 지키는 삶으로 여기게 했다. 그러니, «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 (1요한4,10)라는 말씀을 들으면 이 말씀이 정작 와 닿지를 않는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개인의 탓도 있고, 교회의 탓도 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강제로, 혹은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 때문에, 혹은 결혼을 위한 통과 의례도 아니다. 종교의 자유는 그야말로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을 믿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한 최고의 방법은 성경을 읽는 것이다. 세례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편향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나, 어깨 너머로 들어왔던 지식들을 과감하게 접고, 성경이 알려주는 하느님,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를 받아 들여야 한다. 또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던 초대 교회의 삶의 모습에 대한 증언도 받아 들여야 한다.
노자의 도덕경 11장에는 연식이위기(埏埴以爲器), 당기무(當其無), 유기지용(有器之用)이라는 말이 나온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그릇 안의 텅빔(無)에 의해서 그릇의 쓰임새가 있다는 뜻이다. 그릇 안에 무언가가 가득 차 있으면, 그 그릇은 쓸모가 없다. 자기 안에 편향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나, 어줍잖은 지식으로 알고 있는 하느님, 예수, 교회, 이런 것들을 비워 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알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할까 ? 하느님의 일을 하면 된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 보면, 느끼게 된다. 하느님께서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말이다. 하느님께서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알려준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 모든 멍에를 부숴 버리는 것, 자기의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는 것,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은 집으로 맞아 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는 것,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 이러한 일들이 바로 하느님의 일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일을 오늘날에는 ‘연대’라고 표현한다. 정의, 사랑, 평화를 위해 연대하라 !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 가기 위해 연대하라 ! ‘연대하라 !’는 빨갱이들의 구호가 아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한 단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다. «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소? »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삶과 같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율법 지키고, 의무 지키는 것만이 아니다. 그 율법과 의무가 왜 주어졌는지를 깨닫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 차리며,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과 상통한다. 신앙은 그저 « 하느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경천애인을 내 몸뚱아리로 드러내는 것이 신앙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나에게 참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여러분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