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일 연중 제8주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 사람을 두고 위선자라고 한다. 다른 말로 내로남불형 인간이다. 2011년 5월,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접했던 단어 중의 하나가 ‘내로남불’이었다. 처음에는 사자성어인줄 알았다. 한자로 어떻게 되나 ? 하며, 그 단어를 쓰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박장대소를 하며, «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장난 혹은 불륜 »을 줄여서, « 내로남불 »이라고 하고, 특히 정치권에서 곧잘 쓴다는 친절한 설명도 들었다. 타인의 작은 허물이 마치 이 세상을 무너뜨릴 만큼의 대단한 위험이나 위기라고 여기고 선동하는 사람도 « 내로남불 » 인간형이다.
이에 반해,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면서,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도 보려고 하는 사람을 두고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말 할 줄 아는 사람, ‘그 때는 그럴 수 밖에 더 있었느냐’고 발뺌하기 보다는 ‘그 때는 생각이 짧았다, 그 때 그렇게 생각하고 말해서 미안하다’라고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적어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당신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비교를 하면서 위선자니, 정직한 사람이니 구분을 짓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말씀하신다. «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다. « 배운다 »라고 번역된 « 카타르티조(katartizo) »라는 그리스말은 한쪽의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서로 교육하는 것,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서로 성장한다는 교학상장敎學賞狀을 일컫는다. 그럼 무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일까? 두말하면 잔소리, 세말하면 입만 아픈 사랑이다. 그것도 정의에 입각한 사랑이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할 줄 아는 사랑이다.
교사는 제자를 가르치기만 하고, 제자는 교사로부터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제자가 교사를 가르치기도 하고, 교사가 제자로부터 배우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 쉬운 일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누구는 위선자고, 누구는 정직하고 따위로 편 가르고, 분열시키는 일보다는 분명 나은 일이고, 위대한 일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눈 안에 있는 들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선입관, 편견 또한 눈 안에 있는 들보다. 미운 털이 박히면, 뭔 짓을 해도 다 밉다는 그 미운 털 역시 우리 안에 있는 들보다. 타인의 티가 아무리 작더라도 그 티가 때로는 크게 보여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타인의 티가 들보같이 보이더라도, 그의 티를 이해해보려고 하면, 그를 향한 증오심은 서서히 무너지고, 그를 타이르려고 하거나, 그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기도 하는 게 인간이다.
제 눈 안에, 제 마음 안에 제 머리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 들보를 빼내는 일,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들보를 빼내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서로의 티를 너그럽게 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은 어떨까?
사람 고쳐 못 쓴다고 했지만, 그 사람이 진심 어린 참회와 용서를 청할 때에는 그래도 고칠 수 있는 게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 세상으로부터 바보, 멍청이라는 손가락질과 비난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그래도 하늘 한번 쳐다보며, « 주님, 당신의 십자가가 이런 것이지요? 그 십자가 저도 함께 지고 갈게요 »라고 빙긋이 미소 짓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참 좋은 사람, 오늘 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도 같은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나에게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도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라고, 기도하라고 충고한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