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천주교 신자든 개신교 신도든,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이다. 그런데, 그 신앙은 삶의 실천을 요구한다. 그 삶의 실천의 원리는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과 그들을 향한 우선적인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세상의 중심으로 제시하셨다. 하느님 나라의 중심은 가난한 사람이 차지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 »는 이 복음을 맨 먼저, 가난한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가난한 사람은 더 독하다느니, 가난한 사람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느니, 가난은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면 했지, 가난해지자는 말을 한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가난한 것이 마치 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의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받았다. 이 선택의 삶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 옵션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선택의 삶은 배타성이나 당파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거부나 무관심을 가리키지는 않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사랑과 정의에 대한 관심과 실천에 있어서, 가난한 이들이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은 그저 단순히 잉여의 재화를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선택의 삶은 가난을 사회의 구조악으로 여기고, 그 악을 물리쳐야 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가난을 생산하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구조를 바꾸는 일까지도 다 포함한다.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악이다. 그 악을 극복하는 길은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역사의 창조자요 주체이며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할 이들로 받아들여 이들과 이 악을 제거하는 일에 함께 하는 일, 분명히 정치적이다. 사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그들을 편애하신 예수의 삶 자체가 정치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그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의 삶 역시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세상은 교회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무식하기 그지 없는 말을 해댄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오는 망발인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가난한 이들은 가난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의 형제자매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남의 고통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고통 당하신 예수를 발견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편하고 안락한 생활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하셔서 경제적 가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투신하셨음을 발견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은 물질문명 사회와 그 불의한 구조를 변화시키는데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는 가난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며 동시에 이 현상에 책임과 공모의 죄가 있는 이들의 ‘안일함’에 도전하는 것을 내포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이라는 이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평안을 찾으러 성당에 왔고, «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내가 주는 멍에는 가볍소 » 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를 찾아 왔는데,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라는 이 물음을 던지는 오늘 복음은 나에게 예수 따라 살면,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는 이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