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3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살아가면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을 때, 어느 쪽을 잡아야 할 것인가를 놓고,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 순간에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기준이라는 것이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신앙인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까 ?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고 여겨지던 장소에서 예수께서도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잠시라도 머물고 싶으셨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처럼, «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게 », « 숨어 계시고 »(마르 7, 24)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예수님의 투정 섞인 볼멘소리가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여과 없이 오늘 복음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하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소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27).
그러나 이 말씀에 이은 여인의 «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대답은 예수님의 눈을 번쩍 뜨게 하고, 귀를 활짝 열게 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구원이 유대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신앙을 가진 이 여인의 믿음은, 비록 마귀 들린 딸이 하루빨리 치유되기를 바라는 절박함과 간절함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겠지만, 그의 믿음은 자기 자식만 잘되기를 바라는,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자신의 가정만,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 잘 되기를 바라는 그런 옹졸하고, 이기적인 믿음이 아니었다. «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이 여인의 말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불러들인 말이었다.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별탈 없이 지낸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시절이 수상한 상황에서도 그렇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야 어떻게 살건, 죽건 상관없이 나만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 된다는 식의 삶이고, 무관심과 냉냉함이라는 마귀가 득실대는 세상을 만드는데 가장 좋은 환경이다. 한마디로 위장된 평화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별탈 없이 지내는 것은 참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기도 하다.
이 유혹에 정면으로 저항하신 분들 가운데 두 분을 나는 알고 있다. 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베드로 주교님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다. 제주 해군기지 문제와 관련해서,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을 때, 교회는 마치 전통처럼 중립을 지키고, 중재하는 쪽을 선택해서, 처신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지혜로워 보이고, 그렇게 하면, 교회는 찬성하는 쪽으로부터도, 반대하는 쪽으로부터도 욕도 얻어 먹지 않고, 손가락질도 당하지 않고, 말 그대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처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우일 주교님은 그러지 않았다. 제주 해군 기지 건설 반대의 입장에 서신 것이다. 그것도 맨 앞에 말이다.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함으로써, 가난해지고, 소외 받게 되고, 버림받게 된 강정의 주민들과 평화 활동가들과 함께 고통을 겪는 길을 걷겠다고 선택하고, 결정하신 것이었다.
강우일 주교님과 함께 내가 알고 있는 또 한 분,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다. « 모든 인간적인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라는 이 말씀으로 교황님은 거부하기 힘든 그 유혹으로 인간을 홀리는 마귀를 쫓아내셨다.
오늘 복음의 그 여인처럼, 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님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 오늘 복음은 나에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한다. 참으로 거부하기 힘든 유혹들 앞에서, 늘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나에게 오늘 복음은 마치 죽비竹扉처럼 다가온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