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깨우기
탁은수 베드로
광안성당 · 언론인
언론사에서 일한 지 30년이 됐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요즘 같은 정치적 혼란은 처음입니다. 정쟁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만 찬반이 거칠어지는 광장의 흥분을 틈타 냉소와 분노, 독선 같은 어둠의 힘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고 진영의 논리로 상대를 비난하는 지금의 갈등을 보편된 공동체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행을 태운 배가 돌풍에 휩싸였을 때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이 닻과 돛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깨우는 그 순간이 기적의 시작입니다. 알량한 지식과 경험의 완고함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간절히 부르는 것이 기도이며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믿음 아닐까요? 인간 사는 곳은 어디든 혼란의 위기와 갈등의 몸살을 겪게 마련입니다. 그때야말로 예수님을 불러 깨울 때입니다. 목숨마저 내어 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흘려듣고 잠만 주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응답을 믿으며 위기에 빠진 공동체의 평화와 희망을 청하는 간구는 신자들의 경건한 책무일 겁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기도부터 한다는 판사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수술 방에 들어서기 전 기도를 올린다는 의사분도 만났습니다. 돌아보니 난 기사 쓰기 전에 기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 모임이나 업무에서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는 것은 삼가야 할 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급하고 필요할 때, 그것도 장소를 가려 하느님을 찾은 것은 아닌지 부끄럽습니다. 믿음을 온몸이 아니라 머리로만 받아들이려 했다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며 나를 통해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뤄져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습니다.
갈등을 다루는 능력이 그 사회의 실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갈등 해소는 이해와 존중, 포용이 필수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이야말로 사회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실력자들입니다. 내면을 성찰하는 영성과 나를 넘어서는 사랑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 성하는 희년을 선포하시며 “교회의 사명은 우리의 희망이신 주 예수님을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희망은 성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광장에서도 있어야 합니다. 그 시작은 소리쳐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광장의 분열과 갈등을 넘어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일상을 희망하며 가톨릭이 희망의 진원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마침 2027 세계청년대회 성구가 마음에 박힙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