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미사 강론
봉헌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자기 재산의 일부나 혹은 전부를 봉헌한 착한 사람? 자신의 삶을 봉헌하며 살아가는 수도자나 성직자? 봉헌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에는 대개 무거운 희생의 냄새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봉헌은 원래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로 돌려드리는 일이다. 봉헌은 내가 가진 것들 중에 뭔가 대단한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분의 것을,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던 그것을 그분께 되돌려 드리는 일이다. 하지만, 봉헌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어렵다. 그런데, 봉헌은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핏덩이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던 날, 마리아는 시므온과 안나로부터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당신의 심장을 도려낼 만큼 아픔을 겪을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도 들었다. 그러나 분명 마리아는 ‘하느님, 당신의 아들입니다. 당신께 이 아이를 모두 내어 맡깁니다’라는 심정으로 당신의 아들을 봉헌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나의 것, 내 모든 것, 심지어 내 삶 전부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느님께 주인 자리를 내어 드리는 일이 바로 봉헌이다. 그래서 봉헌의 삶은 ‘내어 맡김의 삶’이고, ‘의탁의 삶’이고 마침내는 ‘은혜의 삶’이다.
봉헌이라는 의미가 이러니까, ‘아이고, 나는 그런 봉헌 못하겠다’ 하며 지레 겁을 먹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봉헌의 삶을 살아 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하느님의 영이 그 사람을 인도한다. 거짓말일 것 같은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성령을 맛본 사람만이 알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봉헌의 삶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일차적으로는 성직자, 수도자들이다. 그렇다고 봉헌의 삶이 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예수’라는 분을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봉헌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어린 아기로 하느님께 봉헌되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 제물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하느님께로 봉헌된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면서,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씀을 하늘로부터 들으시고, 당신의 신원과 당신의 사명을 받았다.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로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아들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의 삶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는 게 무엇일까?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서, 그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최후의 심판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물어 보실 것인지를 알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도왔느냐? 모른 체 하며 살았느냐?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대부분의 본당에서는 기도할 때 켤 초를 갖고 와서 축복을 받고 또 본당에서 쓸 초들을 봉헌한다. 그런데 왜 하필 초일까? 초는 자신을 태움으로써 불을 일으켜, 어둠을 밝힌다. 교회는 일찍부터 전례에서 제대와 함께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표지로 초를 사용해 왔다. 그래서, 초를 봉헌하는 것은 주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일치하여 나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자. 나는 주님께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가? 무엇인가를 봉헌한다면서 스스로 우쭐대지는 않는가? 봉헌의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의 실수나 잘못을 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도 별 볼일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고 혀를 끌끌 차거나, 비난의 레이저 광선을 쏘아 대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 정말 솔직하게 한번 물어보자. 참다운 봉헌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만 있을 뿐, 실천하지는 않고 있지는 않는가?
엊그제가 정월 초하루, 설날이었다. 새해 셋째 날부터 혹여 여러분들의 마음을 후벼파대는 강론을 하는 것 같아 송구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 하고, 알려야 하는 것은 알려야 하니, 본당 신부의 마음을 너그러이 받아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