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미사 강론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 해방하는 하느님,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펼치시는 하느님,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이들을 편애하는 하느님이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를 이야기하면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케 하는 하느님을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 보니, 어제 복음의 내용과 엇비슷한 것들이 눈에 띈다. 어제도 안식일법에 대한 이야기이고, 오늘도 안식일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 간의 의견충돌을 보이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은 야훼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유대교 지도자들의 이해간의 충돌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수 시대 이전부터 율법은 하느님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졌었다. 성경에 나오는 율법은 총 613개 조항이고, 그 가운데, 안식일과 관련해서, 해서는 안될 일이 39가지 조항이 있었다. 예수 시대 율법은 너무나도 까다로웠다. 해산하는 여인이나 목에 이상이 있으면, 안식일이라도 돌볼 수 있었으나, 생명에 지장이 없는 병은 다음 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또 집이 무너져서 사람이 깔렸다면,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보고, 살았으면, 안식일이라도 꺼내주고, 죽었다면 그 다음날까지 그 시신을 그냥 그대로 버려두어야 했다. 뼈가 상한 경우라도, 그것이 생명에 관계가 없으면 안식일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했고, 상해로 피가 나더라도 헝겊으로 그 상처를 싸맬 수는 있어도 약은 바를 수가 없었다. 안식일에는 상처의 악화를 방지는 할 수 있어도 치료행위는 할 수 없었다. 안식일에는 창도 칼도 활도 어떠한 병기도 손에 쥘 수 없었기 때문에, 정당방위도 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분명, 유대교 지도자들의 안식일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법이 진정 생명의 하느님의 뜻을 반영한 법이 아니라, 그저 백성들을 옥죄고, 얽어 매고, 통치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임도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고혈과 눈물로 찬양을 받는 거짓 하느님, 그리고 그 거짓 하느님을 하느님인 양 떠받들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예수께서는 “노기를 띠며” 정면으로 그들에게 맞서 사자후를 일갈한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죽이는 것이 합당합니까?”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은 생명을 위해 불의에 항거하시는 하느님이다. 우리가 예수라는 분을 주님이라고, 구세주라고 고백한다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예수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그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어야 한다. 내 삶의 자리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불의, 부조리에 « 나 몰라라 », 혹은 « 여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 사는 게 그렇지 뭐 별수 있나 ? »하며 애써 눈길을 피해버리고, 묵과해버리고, 묵인해 버리는 것은 나는 예수의 하느님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고 하셨지만, 그 말씀을 귓등으로 듣고 흘려버리고 마는 작태가 혹시라도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발견된다면, 우리 역시 노기 띤 주님의 꾸중을 반드시 듣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 다가온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