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4일 화요일 성탄 성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2024년 12월 24일 밤 8시, 이 미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사실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있었다. 시쳇말로, 두발 달린 짐승이 어디를 못 가겠으며, 네 바퀴 달린 차까지 있다면, 먼 곳까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이런 저런 술집에 두런두런 모여 앉아 원샷, 완샷을 날릴 수도 있었을 테고, 이도 저도 아니면, 방에 콕 쳐 박혀 있는 방콕이나, 방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이리 빈둥, 저리 빈둥거리는 방글라데시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밤, 그 모든 곳들을 뒤로하고, 성당에 와서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자 하는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건 맞이하는 그 어떤 밤보다도 더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지켜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살아 가면서, 이런 저런 상처와 아픔들 때문에, 또 육신의 나약함 때문에, 또 번번이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도 다시 또 무너지고 마는 이 속절없는 게으름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오늘 밤 성당에 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모두 다 잘 오셨다. 

        
잘 오셨다는 립서비스만으로 끝내지 말고, 우리 함께 인사 나누자. 메리 크리스마스 !!! 오늘 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구유에 누우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이 진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저 구유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분이 그 잘난 왕궁도 아니요, 그 화려한 용포 하나 없이 말밥통에서 연약한 아기가 되셔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하느님 스스로 모든 이를 위하여 가장 무력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다그 누구도 당신의 모습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가장 작은 이가장 서러운 이가장 볼품없고 가장 내세울 것 없는 이의 모습을 기꺼이 드러내시며 우리에게로 오셨다. 바로 이것이 강생의 신비이며, 이 강생의 신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구유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밤결코 허용되지 않을 것만 같은 하느님의 처연한 연약함을 체험하기 위해 모였다. 우리가 구유를 꾸미고 마굿간을 세운 것은 하나의 신화를 숭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구유 앞에서 강생의 신비를 깨닫고, 강생의 신비를 우리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재현하기 위해서 여기 모인 것이다. 

        오늘 밤, 구유 앞에서 나는 이렇게 기도해 본다. 이 기도가 우리들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바라며, 이렇게 기도해 본다.

       주님, 당신께서는 스스로 낮춘 존재가 셨지만, 저는 언제나 높았고 당신은 이리 작은 존재가 되셨지만, 는 언제나 큰 사람 대접을 바래 왔습니다. 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또한 새벽닭이 울었을 때 결국 자신이 그런 사람일 뿐임을 깨달았던 것처럼마굿간에서의 새벽도 오직 겸손만을 가르치나이다. 주님, 겸손만이 저 구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기도임을 깨닫게 하소서. 

     오늘 저희는 저 구유에서,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고 오직 하느님 뜻에 철저히 승복해버린 한 미혼모를 보았고아이 놓을 방도 하나 잡지 못해 짐승의 마굿간에 의탁했던 무능한 아버지를 보았으며하늘의 길을 물을 줄 알던 겸손했던 사람들과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순박했던 사람들그리고 구유에 누워 있었던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보았나이다. 

       이 성탄의 밤, 저희들 서로가 서로의 무력함을 위로할 수 있는 밤이 되게 하소서. 잘 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부족함들을 품어줄 수 있는 밤이 되게 하소서.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노라고 말하지 못했던 그 부끄러움들을 들어줄 수 있는 밤이 되게 하소서. 슬플 때에 함께 슬퍼하지 못하고, 세상 살이 바쁘게 살아가니,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애써 잊으려 했던, 차갑기 그지 없었던 날들을 부끄러워 하며,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절대로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밤이 되게 하소서. 

무력하기 위해 오셨고 품어주기 위해 오셨으며 들어주기 위해 오신 분기어이 베들레헴의 말구유를 갈바리아의 십자가에까지 옮겨놓으신 분, 그 모든 일들이 사랑임을 저희에게 가르치신 분, 주님, 아기로 오시는 당신께서 저희에게 주신 선물은 바로 사랑임을 깨닫고, 그 사랑을 저희들의 삶 속에서 실천하게 하소서. 

«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치는 »(이사야 9,1) 날, 그래서 오늘 크리스마스는 힘있고 돈 있는 사람들의 힘 자랑, 돈 자랑 축제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 나약한 이들, 무력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응원하는 축제가 되게 하소서. 특히 이 나라 이 땅 대한민국의 2024년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거짓과 불의는 결코 진실과 정의를 이길 수 없다는 이 진리가 펼쳐지는 대축제날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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